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조승희씨의 총에 맞아 숨진 케이틀린 해머런의 친구들인 셀레스트 라이저(19)와 제인 창(24·왼쪽)이 지난달 26일 버지니아공대 캠퍼스 추모비 옆에서 해머런을 추모하고 있다. 블랙스버그/AP 연합
강준만 교수·이현송 교수
버지니아공대 참극은 25일(현지시각) 미국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와 함께 겉으로는 마무리 국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한국 사회에 준 충격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인이 국제무대에서 저지른 초유의 대형 참극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려져 있던 두 가지 쟁점을 전문가 기고를 통해 살펴본다.
‘1.5세도 한국인’ 시각은 특유의 연고주의 때문 / 강준만
한국사회 과민반응은 고향·출신학교 따라 편가르는 체질 산물 한국 사회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한국 문제’로 여기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간 나온 분석들은 한국인의 유별난 민족주의·집단주의·숭미주의 등에 그 원인을 돌렸다.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좀더 정교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과민반응에 대해 ‘과잉 민족주의’ ‘천박한 민족주의’ ‘집단적 죄의식’ 증후군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과연 그런가? 민족주의와 관련은 있지만 민족주의가 원인은 아니다. 한국인의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독특성에 주목하는 게 문제의 핵심을 짚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은 범주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그 능력은 기질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불확실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의 나이, 고향, 출신학교 등 신상명세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 그런 기본 정보로 상대방을 어떤 범주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불편해하다 못해 불안증세마저 보인다. 그런 기질엔 명암이 있다. 일을 처리하거나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서 신속을 기할 수 있는 반면, 편견과 ‘편가르기’가 발휘되는 토양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속도에 대한 숭배는 체질로 굳어졌기 때문에 그 어떤 부작용에도 이 ‘범주화 게임’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그런 독특한 기질을 갖게 된 건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일극 집중구조, 높은 인구밀도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어느 범주(편 또는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에 대한 지독한 차별도 바로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비슷한 참사가 국내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이 범인의 출신지역과 학교를 안 따질 것 같은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본능이다. 이는 집단주의와 비슷하지만 집단주의는 아니다. 한국인은 강한 집단주의 기질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집단이익보다는 개인·가족 이익을 앞세운다. 반쪽짜리 집단주의라고나 할까. 이는 서양에서 개발된 ‘개인주의-집단주의’ 모델로는 포착이 안 되는 한국적 특성이다. 한국인들의 집단주의·민족주의가 강하다고 하지만, 집단·민족에 대한 충성도는 높지 않다. 충성도는 낮은 반면 범주에 대한 인식도만 높을 뿐이다. 즉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것도 실은 ‘인지’와 ‘충성’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이민 1.5세대를 한국인으로 보는가? 범주화 기질에 따라붙기 마련인 본질주의 성향 때문이다. 한국인의 천성이 된 연고주의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연고를 본질로 보고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일상적 삶의 태도는 철저하게 자기 이익 중심이라는 점에서 집단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과민반응이 애국·애족심 때문이었을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 이미 모든 국면에서 미국화된 한국 사회의 미국 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걸 웅변해주는 걸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막연한 숭미주의를 넘어서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나와 내 가족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옳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 10만명 시대’와 최근의 ‘토플 광풍’이 말해주듯이, 이제 서울에선 국내 지방 도시보다는 미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의 과정과 절차가 ‘통상독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반민주적 작태로 일관했는데도 의외로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의 집단주의·민족주의 비판은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의 ‘범주 집단’은 알뜰하게 챙기고 관리하면서 그런 비판을 하는 건 위선이다. 한국인은 범주화 기질 때문에 공정성에 매우 취약한 국민이다. 개인별 평가보다는 이른바 ‘범주 등급제’가 제공해주는 과정·절차 축소의 비용절감 효과를 더 높이 평가한다.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있는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미 주류 ‘관용’ 취했지만 감춰진 편견·차별 우려 / 이현송
파문 빠르게 소멸한 건 총기 쟁점화 꺼린 미 정치권 침묵 탓 버지니아공대 캠퍼스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의 작동논리를 깊이 살펴볼 필요성을 우리에게 안겼다.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초점이 바뀌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부각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범인 개인의 성격 결함과 정신적 문제로 초점이 이동하고, 자유로운 총기 소지의 문제점을 언급하는 듯하다가, 조만간 논의를 끝낼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걱정과 달리 미국의 주류 사회(언론매체와 정부)는 “조승희가 한국인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며 외견상 ‘관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재미 한국인 동포사회는 ‘과잉 사죄’를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선 첫째로,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개인의 성격결함이나 미치광이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파헤친 배경을 살펴야 한다. 이는 매스컴의 선정주의적인 취향도 있지만, 모든 사회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는 미국인의 경향도 한몫한다. 둘째, 인종 문제와 관련해선 사건 초기에 미국 경찰 관계자가 범인이 ‘한국인’(Korean)이라는 점을 거듭 언급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미국 사회문화의 기본적인 토대가 ‘인종’, 특히 백인과 유색인의 구분이라는 점을 반영한 반응이다. 미국 문화에서 아시아인은 성실하고 근면한 ‘모범적인 소수인’이라는 긍정적인 인식과 더불어 소극적이고 교활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미국 주류 사회가 ‘관용’을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규범이 작동한다. 실제는 인종주의자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혜택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인종차별이 없는 듯이 공공장소에서 언급하지 않는 규범이 그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이 워낙 민감한 문제인 탓이다. 이런 규범은 특히 1990년대에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지난번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에서도 미국 정부 당국자는 이것은 인종문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셋째로, 한국인 동포사회가 거듭 사과하는 것은 그들의 체험에서 나온 반응이다. 미국 주류사회의 공식적 반응과 달리 동포들로서는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건을 계기로 커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사람은 ‘왜 있잖아 한국인 학생이 저지른 총기 난사 사건 있잖아’ 식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 언론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적 언급을 자제하고 정부 당국자도 인종문제가 아니라고 거듭 표명했지만 한국 동포들은 안심하기 어렵다. 네번째로, 사건의 충격이 매우 컸던 것에 견줘, 의외로 급속하게 미국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점도 관심을 둘 만하다. 으레 총기 소지 문제가 도마 위에 떠올라 일대 논쟁이 벌어지던 다른 총기 난사 사건과 비교해도 이번 사건은 다르다. 사실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총기가 2억4천만 정이나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총기로 인한 살상이나 사고는 교통사고 다음으로 흔한 미국인의 재앙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에서는 특히 정치권이 언급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배경에는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적 계산이 엿보인다. 전통적으로 총기 규제 강화를 주장해 온 민주당이지만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부와 서부지역의 정치적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바로 이 지역에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다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건 혹은 개인주의적인 태도 때문이건 조승희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이른 시일 안에 미국 여론에서 사라질 것이다. 엽기적인 사건은 오래 관심을 붙잡아 둘 수 없으며, 사회의 지도층이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여론에서 쉽게 퇴장당한다. 그러나 조승희 사건이 미국인의 인종주의적 감정에 던진 돌멩이의 파장은 상당 기간 머물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국제지역대학원
‘1.5세도 한국인’ 시각은 특유의 연고주의 때문 / 강준만
한국사회 과민반응은 고향·출신학교 따라 편가르는 체질 산물 한국 사회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한국 문제’로 여기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간 나온 분석들은 한국인의 유별난 민족주의·집단주의·숭미주의 등에 그 원인을 돌렸다.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좀더 정교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과민반응에 대해 ‘과잉 민족주의’ ‘천박한 민족주의’ ‘집단적 죄의식’ 증후군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과연 그런가? 민족주의와 관련은 있지만 민족주의가 원인은 아니다. 한국인의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독특성에 주목하는 게 문제의 핵심을 짚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은 범주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그 능력은 기질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불확실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의 나이, 고향, 출신학교 등 신상명세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 그런 기본 정보로 상대방을 어떤 범주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불편해하다 못해 불안증세마저 보인다. 그런 기질엔 명암이 있다. 일을 처리하거나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서 신속을 기할 수 있는 반면, 편견과 ‘편가르기’가 발휘되는 토양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속도에 대한 숭배는 체질로 굳어졌기 때문에 그 어떤 부작용에도 이 ‘범주화 게임’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그런 독특한 기질을 갖게 된 건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일극 집중구조, 높은 인구밀도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어느 범주(편 또는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에 대한 지독한 차별도 바로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비슷한 참사가 국내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이 범인의 출신지역과 학교를 안 따질 것 같은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본능이다. 이는 집단주의와 비슷하지만 집단주의는 아니다. 한국인은 강한 집단주의 기질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집단이익보다는 개인·가족 이익을 앞세운다. 반쪽짜리 집단주의라고나 할까. 이는 서양에서 개발된 ‘개인주의-집단주의’ 모델로는 포착이 안 되는 한국적 특성이다. 한국인들의 집단주의·민족주의가 강하다고 하지만, 집단·민족에 대한 충성도는 높지 않다. 충성도는 낮은 반면 범주에 대한 인식도만 높을 뿐이다. 즉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것도 실은 ‘인지’와 ‘충성’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이민 1.5세대를 한국인으로 보는가? 범주화 기질에 따라붙기 마련인 본질주의 성향 때문이다. 한국인의 천성이 된 연고주의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연고를 본질로 보고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일상적 삶의 태도는 철저하게 자기 이익 중심이라는 점에서 집단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강준만 교수
미 주류 ‘관용’ 취했지만 감춰진 편견·차별 우려 / 이현송
파문 빠르게 소멸한 건 총기 쟁점화 꺼린 미 정치권 침묵 탓 버지니아공대 캠퍼스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 사회의 작동논리를 깊이 살펴볼 필요성을 우리에게 안겼다. 이번 사건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초점이 바뀌었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점이 부각되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범인 개인의 성격 결함과 정신적 문제로 초점이 이동하고, 자유로운 총기 소지의 문제점을 언급하는 듯하다가, 조만간 논의를 끝낼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의 걱정과 달리 미국의 주류 사회(언론매체와 정부)는 “조승희가 한국인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며 외견상 ‘관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재미 한국인 동포사회는 ‘과잉 사죄’를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선 첫째로, 미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개인의 성격결함이나 미치광이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파헤친 배경을 살펴야 한다. 이는 매스컴의 선정주의적인 취향도 있지만, 모든 사회 문제를 개인의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는 미국인의 경향도 한몫한다. 둘째, 인종 문제와 관련해선 사건 초기에 미국 경찰 관계자가 범인이 ‘한국인’(Korean)이라는 점을 거듭 언급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미국 사회문화의 기본적인 토대가 ‘인종’, 특히 백인과 유색인의 구분이라는 점을 반영한 반응이다. 미국 문화에서 아시아인은 성실하고 근면한 ‘모범적인 소수인’이라는 긍정적인 인식과 더불어 소극적이고 교활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미국 주류 사회가 ‘관용’을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규범이 작동한다. 실제는 인종주의자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혜택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인종차별이 없는 듯이 공공장소에서 언급하지 않는 규범이 그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이 워낙 민감한 문제인 탓이다. 이런 규범은 특히 1990년대에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널리 확산되었다. 지난번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에서도 미국 정부 당국자는 이것은 인종문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셋째로, 한국인 동포사회가 거듭 사과하는 것은 그들의 체험에서 나온 반응이다. 미국 주류사회의 공식적 반응과 달리 동포들로서는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건을 계기로 커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사람은 ‘왜 있잖아 한국인 학생이 저지른 총기 난사 사건 있잖아’ 식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언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 언론이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적 언급을 자제하고 정부 당국자도 인종문제가 아니라고 거듭 표명했지만 한국 동포들은 안심하기 어렵다. 네번째로, 사건의 충격이 매우 컸던 것에 견줘, 의외로 급속하게 미국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점도 관심을 둘 만하다. 으레 총기 소지 문제가 도마 위에 떠올라 일대 논쟁이 벌어지던 다른 총기 난사 사건과 비교해도 이번 사건은 다르다. 사실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되는 총기가 2억4천만 정이나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총기로 인한 살상이나 사고는 교통사고 다음으로 흔한 미국인의 재앙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에서는 특히 정치권이 언급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배경에는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적 계산이 엿보인다. 전통적으로 총기 규제 강화를 주장해 온 민주당이지만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남부와 서부지역의 정치적인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바로 이 지역에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이 다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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