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기/논설위원
아침햇발
1942년 1월 화약 판매를 담당하던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에 한 한국인 젊은이가 입사한다.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의 청년 김종희였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 입사 3년여 만에 일본이 패망해 물러가면서 회사 관리인이 됐다. 한국전쟁 휴전회담이 한창이던 52년 10월에는 정부로부터 회사를 인수한다. 지금 한화그룹의 모태가 된 한국화약㈜이었다. 전후복구로 사세는 커져갔고, 59년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함으로써 회사는 굳건한 발판 위에 올라선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한때 위기가 있었지만 81년 창업자 김종희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화약은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이것이 김승연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오르기 전까지의 한화다. 스물아홉에 그룹 경영을 떠맡은 김승연 회장은 재벌기업 총수 치고는 유독 부침이 심했다. 정치권 및 연예인과의 부적절한 소문, 동생 김호연씨와의 상속권 분쟁, 외화 밀반출 혐의로 집행유예 판결 등 …. 그는 한때 돈 많고 사고 잘 치는 재벌 2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이미지가 바뀌게 된 계기는 외환위기다. 은행권 협조융자로 자금난을 넘긴 한화는 우량 계열사들을 대거 매각한 덕분에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구조조정 모범기업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김 회장의 면모도 달라졌다. 훨씬 정중하고 겸손해졌다. 또 최대한 자신을 낮췄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항상 이런 얘기를 했다.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갈비를 들어내고 폐를 잘라내는 심정으로 구조조정을 했다”고. 직원들을 자른 얘기가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기가 여러 차례였다.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터득할 수 있는 삶의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는 몇 해 사이에 훨씬 성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몸 낮추기’는 이후에도 3~4년 계속된다. 2002년 대한생명 인수에 성공할 때까지.
그가 눈물겨운 구조조정 경험을 전파하고 다니는 동안 한화는 대한생명을 인수하려고 치밀하고 조직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정·관계를 대상으로 총력적인 로비전이 펼쳐졌다. 당시 공적자금관리위원장이었던 전윤철 전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15억원의 뇌물을 전달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어찌됐든 김 회장은 절치부심 끝에 한화보다 덩치가 두 배 이상 큰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시련은 다시 시작된다. 그는 2003년 말 시작된 대선자금 수사의 칼끝을 피하지 못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2심에서 벌금형으로 감경된다. 곧이어 검찰의 대한생명 인수 로비의혹 수사가 시작된다. 다행스럽게도 김연배 부회장을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감옥 문턱까지 갔다가 구사일생했다. 그로부터 한 해 뒤, 이번에는 보복폭행 사건이 폭로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대한생명 인수에 성공하고 검찰의 예봉을 피해낸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일격을 당한 셈이다. 불운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끝없이 사건을 몰고다닌다고 해야 할까.
김승연 회장은 참 많은 시련을 겪었고, 이를 통해 성장했다. 이제는 철없던 재벌가의 황태자가 아니다. 그러나 성숙한 재벌기업 총수로 다시 태어난 듯 보였던 김 회장이 남대문경찰서 조사실에 앉아 있는 모습은 과거의 그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눈물을 글썽이며 회사를 떠난 종업원을 걱정하던 인간적인 면모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폭행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는 대목에서는 과거의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분위기만 느껴진다.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남기/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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