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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도굴’을 보장하는 나라 / 황평우

등록 2007-05-10 18:28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기고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는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만큼 역사·문화적으로 인류의 활동이 왕성했다는 증거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발굴을 가장해서 귀중한 우리 유물을 도굴해 갔다.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들이 발굴 현장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광복 뒤 우리 스스로는 발굴을 못해 다시 일본인을 불러서 배웠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고, 무령왕릉 발굴에서 하룻밤새 소중한 무덤유물을 쓰레기 훑듯 퍼낸 치명적 실수도 겪었다. 이후 한국의 고고학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질적인 성장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한국의 발굴역사는 학문적 요구보다는 마구잡이식 개발의 부수입에 불과하다.

엄격하게 말하면 땅속에 있는 유물은 그대로 두는 것이 최고의 보존방법이라고 한다. 몇 천 년, 몇 백 년 동안 땅속에서 안정화 되어있는 유물을 갑자기 다른 환경에 노출시키면 유물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발굴기술이 향상된 후에 해도 늦지 않고 역사와 문화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발굴과 도굴의 차이는 무엇인가? 유물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도굴과 발굴은 같다. 다만 발굴은 규정과 학문적 공공성을 바탕으로 행해지기에 그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각종 도시 만들기와 뉴타운 건설 등으로 이어지는 막개발이 많은 나라는 드물 것이다. 이에 편승해 발굴기관은 편의점처럼 늘어났고, 부실조사와 인건비 횡령, 개발업자와 결탁과 압력 등으로 말미암아 자정의 목소리가 있었다. 2005년에는 대학박물관의 발굴에 발굴면적(4천평 이하)과 일수(연 150일) 제한을 뒀다. 발굴일수를 제한한 것은 학기 중에는 공부와 연구라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면서 방학기간 동안 발굴을 진행하자는 취지에서다.

그런데 5월7일 정부는 ‘매장문화재 조사업무 처리 지침’을 일방적으로 개정해서 발표했다. 민원 해결 차원이라는 토를 달면서 대학박물관의 발굴 제한을 폐지하고, 100일 이상 발굴에 대해서 문화재위원회 심의 안건으로 채택하던 것을 200일 이상으로 확대했다. 또한 발굴 후 가장 중요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소규모 발굴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정부는 건설업자들의 민원을 가장해서 도굴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능력이나 학문의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한 발굴은 도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대학에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한 인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나마 부족한 고고학 전문인력도 편의점처럼 늘어난 법인체 발굴기관에서 영입해 가는데, 대학이 대체 어떤 인력으로 그 넓은 면적을 발굴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200일 이하 발굴현장은 문화재위원회에 안건 상정이 안 된다면 발굴현장의 보존이나 처리는 누가 하느냐도 문제다. 심지어 한 명의 전문가만 허락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니 개발업자들은 경사가 났을 것이다.

발굴일수에 따라 유물의 보존이나 처리를 결정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 있는가. 그러잖아도 가끔 터지는 발굴현장의 비리에 가슴이 아팠는데 앞으로 199일 발굴이 유행병처럼 퍼질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발굴현장의 인건비 횡령, 건설업자와 결탁, 보고서 미발간 등의 사건이 언론에 자주 등장할 것이 뻔하다.

이번 매장문화재 제도 개선의 이면에는 개발업자의 민원에 시달린 고위 부서의 압력행사가 있었다는 말도 나오는데, 역사와 문화는 행정의 도구로 쓰지 말 것을 당부한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번 ‘도굴의 합법화’ 는 당장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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