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객원논설위원칼럼
‘6월 항쟁’ 20돌을 맞아 모든 언론들이 그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6월 항쟁’이 아니라 ‘7, 8월 대투쟁’이었다. 처음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6월 항쟁’은 점차 참여의 폭을 넓혀 서울 도심에 150만명의 인파가 모일 정도로 대단했지만, 노태우의 ‘6·29 선언’이 나온 뒤 급격하게 투쟁을 정리했다. 그렇게 도시의 거리에서 최루탄 가스가 사라질 무렵, 노동자들은 울산에서부터 새로운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1987년 7월부터 10월까지 3천건이 넘는 파업이 발생했고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수는 122만여명으로 당시 10명 이상 사업체 노동자 수 333만명의 37%에 이르렀다. 공단에 들어선 공장들마다 파업, 점거농성, 조업중단, 휴업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가끔 ‘정상조업’을 하는 이상한(?) 사업장이 끼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전 산업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사실상의 ‘총파업’이었다. 활동가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노조 설립신고 서류들을 꾸미느라 바빴다.
이러한 양상에 대해서는 “6월 항쟁의 계급적 한계와 6·29 선언의 기만적 성격을 꿰뚫어본 노동자들이 형식적 민주화 요구를 실질적 경제 민주화 투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정치적 민주화에 무관심했던 노동자들이 세상이 좋아진 뒤에야 비로소 이기적 유익을 챙기기 위해 거리에 나섰다”고 폄하하는 극단적인 시각이 공존하지만, 그러한 논쟁은 “민주화가 밥 먹여 준다”고 어느 노동자가 투박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로 역사 앞에서 무색해진다.
새삼 ‘6월 항쟁’의 주역이었노라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방송에 소개되는 사람들 말고, 그때 대열의 끄트머리쯤에 겨우 참여했다가 전투경찰에 쫓기면서 골목에 숨어 두려워 떨었던 수많은 시민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7,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던 훌륭한 ‘투사’들 말고, 겁먹은 눈으로 대오의 끄트머리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저녁에 친구들과 둘러앉아 “생전 처음 어깨를 당당하게 펴 봤노라”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노동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직장에서 거의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는 ‘6월 항쟁’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주역들은 대학 다니는 자식들 학비와 결혼비용 마련 걱정으로 표정들이 어둡다.
몇년 전, 서울의 한 구청에서 민주화운동 보상신청 사실조사 업무를 담당했던 공무원이 애타게 말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은 올바르게 살겠다고 애쓴 진짜 노동자들이야. 지금 운동권에서 어떤 직책을 갖고 있거나 노동조합 간부도 아닌 사람들, 농성장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채 구사대나 전경한테 얻어맞고 쫓겨나 그 뒤에는 취업도 안 돼 고생하는 사람들, 진료 받았다는 기록도 없고 활동을 입증해줄 자료도 없는 사람들, 어떻게 좀 유인물 한 장이라도 좀 찾아보시라고 부탁을 해보지만 어디서 구해볼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 ….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진술조서를 최대한 잘 받아주는 일밖에는 없어. 정말 안타까워.”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인터넷 게시판에는, 몇년 전에 했던 파업 때문에 어느 병원에도 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간호사의 편지가 올라와 있고, 그렇게 애타는 모습으로 말했던 공무원은 노조의 간부가 되어 정부청사 옆 거리에서 십여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지만 정부는 대화조차 마다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연 민주화됐는가?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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