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객원논설위원칼럼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가루가 난무했던 20년 전, 우리는 각자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었던가? 그때 서로가 위치했던 곳과 행동했던 바는 달라도 ‘군사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민주주의 쟁취를 절실히 갈망했던 이들을 우리는 민주화세력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이란 길게는 한·일 국교정상화 거부, 3선 개헌 반대를 외치던 60년대, ‘얼어붙은 저하늘’을 만들어 버린 유신체제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70년대, 그리고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압살시키고 출발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퇴진을 도모했던 80년대까지 무려 30년 동안 한국 현대사를 통해 존재해 왔던 실체이다. 그리고 그들은 ‘87년을 분기점으로 체제 밖에서 체제 안으로 들어와, 정치인으로서 아니면 사회의 한 영역을 책임진 기성인으로서 이 땅에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게 된다.
흔히 민주화세력은 산업화세력에 비교된다. 산업화세력이 권위주의적 국가질서와 군사적 자원동원 체계를 바탕으로 고도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세력이라면, 민주화세력은 탈권위적 국가질서와 공정한 경제질서를 토대로 민주주의 발전을 추구했던 세력이다. 그러나 양 세력이 기반한 가치는 훨씬 더 대조적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간직한 채 살 수 있어야 하고, 단독자로서의 ‘외로운’ 개인이기 보다는 사회적 연대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가치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그런 세상에 대한 전망을 공유한 이들이 바로 민주화세력이었다.
이에 비하면 산업화세력이란, 경제성장을 위해서라면 인간이 수단화될 수 있고, 시장에서의 경쟁이 공동체원리보다 우선하며, 사회정의란 어차피 온전한 실현이 불가능한 것이라 본다. 결과론적으로 경제성장이라는 물질적 결과에 의해 모든 과정상의 부작용이 보정되거나 합리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산업화가 주로 경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민주화는 대개 정치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민주화세력은 정치에 강했지만 불행하게도 사회·경제정책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바로 이 점이 민주화세력이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가 거의 도달된 2000년대에 새로운 전망을 공유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분화된 원인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민주화세력에 의한 집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공히 신자유주의와 복지가 원칙없이 절충된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세력은 이제 복지세력으로 거듭 나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연대, 그리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모델로 복지국가가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는 인식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대안들로 재무장되어야 한다. 한국 현대사 50년을 풍미했던 민주화세력들이 복지세력으로 거듭난다면, 복지는 경제와 선순환할 수 있다고, 복지는 사회투자적 속성이 있다고 산업화세력에 비굴한 용인을 구하는 논리에 더는 천착하지 않아도 된다. 민주화세력이 복지세력화된다면, 북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세계 최고의 국가경쟁력을 낳고 성장과 복지를 합일해 나간 그 길로 나아가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될 것이다.
복지. 산업화세력에겐 낡고 빛바랜 것일지언정 이 땅의 민주화세력에겐 끝나지 않은 사명을 다하기 위한 시대적 돌파구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까지의 대선이 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간의 대결이었다면, 이번 대선은 산업화세력과 ‘복지세력화된’ 민주화세력 간의 대결이다. 그러기에 결코 패퇴할 수 없는 또 한번의 역사적 승부처에 우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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