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객원논설위원칼럼
한국 민주주의의 성숙 속도는 가히 세계 제일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국가들 중 군부의 쿠데타와 독재 정부의 폭정을 딛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성공시킨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주권재민이 실현되고 있다. 공정한 투표를 거쳐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국회나 직접 통치의 권한을 인정받은 대통령의 권위와 정당성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시 법이 규정한 절차와 원칙을 거쳐 결정하는 것은 무오류의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절차에 따른 결정이 오히려 ‘민초’에게 족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스스로의 주권을 대변하라고 뽑은 선량으로부터 주권을 침해받는 상황이 초래되는 것이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이런 ‘역설’의 단적인 예다. 5년 전 보건복지부 관료들이 재정고갈만을 걱정하여 단순히 급여를 깎고 보험료를 올리는 지극히 관료다운 안을 만들었다. 여기에 유시민 의원이 빈곤 노인을 위한다며 설계한 효도연금안을 자신이 장관이 되어 교묘히 결합시켜 기형적인 신종 연금개악안의 뼈대를 완성하였다. 그러고는 작년 말 연금 개혁이란 미명 아래 갑자기 무대의 전면에 오르기 시작했고, 사뭇 정쟁의 틈바구니에 끼여 보험료율, 급여율, 기초노령 연금액과 시행 연도 등에 관한 현란한 조합만이 정략적 협상 테이블에서 난무하였다.
결국 단 한 번도 국민들을 정면으로 상대하여 그들의 노후생활 전체를 책임질 사안에 대한 당당한 설명이나 논의 과정 없이 다수당 사이의 합의라는 이름 아래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처리되었다. 그 내용이란 것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연금 고갈 시점을 겨우 10여년밖에는 연장하지 못하였고, 기초노령 연금의 수급자 또한 알려진 바와는 달리 50% 정도의 노인에게만 적용되는 알량한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국민의 연금 수준은 3분의 2로 깎였고, 2008년까지 20년에 걸쳐 연금제도가 계속 수정되어 나가도록 17대 국회가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최근 연금제도를 개혁한 수많은 나라의 경우를 뒤져봐도 이렇게 반복지적인 연금안이 이렇게 짧은 시일 안에, 이렇게 저항 없이 통과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세계 연금 제도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다.
이러한 대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에 299명의 국회의원 중 128명은 결석하였고 끝내는 154명만이 찬성하는 모양새를 보인 것은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따라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행한 일이므로 누구도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일찍부터 노동자와 시민, 기업 등을 대표하는 사회 제세력이 참여한 연금연석회의를 통해 대타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국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인데 또다시 무슨 대표기구를 만드느냐고 심드렁했던 것도 절차적 민주주의 쪽에서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찬성표를 던진 154명의 국회의원 중, 자신들이 통과시킨 법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걸린 2008년에 민초들에게 적용되는 연금 급여율이 얼마인지를 아는 의원 나리가 몇일지를 상상해 보는 것은 지나친 신성모독, 아니 입법부 모독일까?
사학법이 그렇고 법학전문대학원법(로스쿨법)이 그렇다. 앞으로 닥쳐올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 과정에서 역시 이런 무지와 무념으로 무장된 국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대의 속에서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이 땅에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하는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우리네 민초들이 해야 할 소임이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고단한 아침이다.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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