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북한 핵 폐기의 수단이자 목표다. 북한은 스스로 생각하는 체제 위협 요인이 사라져야 궁극적인 핵 폐기에 나설 것이고,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는 핵 폐기는 의미가 반감된다. 따라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노력은 동시에 밀도있게 진행돼야 한다. 2·13 합의 역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지금으로선 그 협상을 누가 언제 어떻게 시작할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정전 상태를 평화 상태로 전환하는 한편, 평화를 제도화하고 정착시켜 나가는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진다. 첫째는 남북 적대관계 청산과 평화공존 구조 구축이다. 이는 평화통일로 가는 사전 단계이기도 하다. 다음은 북한과 미국·일본 사이의 관계 정상화다. 특히 북-미 수교는 평화체제의 필수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나라들이 모두 참여하는 평화·안보 장치 마련으로, 평화체제의 지속성을 담보한다.
이런 다차원적 과정의 한가운데에 평화협정이 자리한다.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는 임기 막바지인 내년 말 이전까지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또한 북-미 수교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후에 이뤄질 것이라고 말해 왔다. 미국이 생각하는 평화협정 전제조건에, 북한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 포기까지 포함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곧, 미국은 핵무기를 제외한 북한 핵 폐기가 이뤄지는 대로 평화협정을 맺고 그 뒤 핵무기 포기와 함께 북한과 수교하는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이런 시나리오는 지금의 정전체제가 핵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한다.
미국의 이런 적극적 움직임은 평화체제 논의에 좋은 조건을 이룬다. 하지만 그 조건을 활용해 미래의 한반도에 맞는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일이다. 우선 시간과 신뢰의 문제가 있다. 지금 6자 회담이 진행되는 속도로 볼 때 내년 말까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는 쉽지 않다. 시간을 압축적으로 사용할 만큼 북한과 미국 사이 신뢰도 깊지 못하다. 내년 말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미국의 새 정권이 정책 기조를 확정할 때까지 1년 정도 공백기가 생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평화협정의 일차적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화협정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인 남북이 주도해야 하며, 북-미 관계 정상화는 평화체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평화체제 논의는 시작도 하기 전에 왜곡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한꺼번에 풀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남북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평화체제의 중요 요소이면서, 평화체제 논의 틀을 제대로 설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정상회담은 나라별로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엉킬 평화체제 협상 과정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동력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관련국간의 신뢰를 높이고 협상 시간을 단축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한국이 모든 6자 회담 참가국과 얘기가 잘 통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점도 정상회담의 가치를 더한다.
북한 체제의 특성으로 볼 때 다른 어떤 것도 정상회담을 대체할 수 없다. 긴 시간이 걸릴 평화협정에 앞서 종전선언 또는 평화선언에 먼저 서명하자는 의견이 최근 제기되는데, 이 또한 정상회담에서 정리해야 할 사안이다. 청와대는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 “임기 말과 상관없이 필요한 시점이 되면 할 수 있다는 게 기본원칙”이라고 밝혀 왔다. 지금이 그 시점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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