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객원논설위원칼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60년대 역사시인 신동엽의 피울음이다. 온통 먹구름과 쇠항아리로 덮인 하늘, 그것을 하늘이라 믿었던 이들에게 구름 한자락 없는 맑은 하늘을 깨우쳐 준 절규의 시구로 기억된다. 시인은 이 한 편의 시로 4·19 혁명의 절망과 위대함을 노래했다. 시인을 모독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오늘날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대통합을 둘러싼 정치상황을 보면서 이 시간 감히 “누가 ‘대통합’을 보았다 하는가?”고 묻고 싶다.
대통합만이 수구세력의 부활을 막는 유일한 돌파구라 여겨 왔던 정치권과 일부 시민사회 세력의 결합 시도는 우여곡절 끝에 신당의 탄생으로 일단 매듭지어진 듯하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결과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확보하였다는 희열로 많은 지지자들에게 잔잔한 파고를 일으켜야 했다. 그 파고는 서서히 파장을 더해 마침내 해일이 되어 이 시대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대선에서 이들이 승리하느냐의 문제를 넘는 것이었다. 앞으로 전개될 21세기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미래세력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결과는 이런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정치인들끼리의 명분과 세력 다툼, 그리고 정략적인 행보야 그렇다고 치자. 문제의 핵심은 기존 정치인들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재탄생에 대한 어떤 ‘씻김굿’도 없었다는 점이다. 새로이 수혈되었다는 시민사회 인사들도 개개인의 명망은 차치하고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여 진입하지 못했다. 신당의 존재를 의심하게 할 만한 치명적인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의 대통합인가, 누구들의 대통합이란 말인가? 작금의 상황을 보면 근본적인 물음을 되던지지 않을 수 없다. 확언컨대 대통합은 정파나 정치인들의 통합이 아니다. 단순히 정치권과 새로운 시민사회 인사들 사이 통합을 위한 통합도 아니다. 집권을 위한 ‘묻지마’ 통합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 40년 한국사회의 진보를 주도한 민주세력과, 적어도 앞으로 수십년을 주도할 미래세력 사이 대통합이어야 한다. 곧, 국민에게 한때 엄청난 신뢰를 받았던 민주세력이 새로운 미래세력으로 탈바꿈되고, 새로이 움트는 미래세력이 민주세력의 정통성을 승계한다는 사회적 ‘세례의식’이 바로 대통합이어야 한다.
이땅에서 인권과 정의, 자유와 평등의 본연적 가치를 지켜 왔던 민주화 세력. 새로운 21세기를 열어갈 혁신과 창조적 파괴, 발상의 대전환을 구현하여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의 지체현상을 타개해 줄 새로운 미래세력. 이들의 화학적 결합이 바로 대통합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세력과 미래세력이 함께 구현해 나갈 공동의 전선에 사회복지 정책이 자리하고 있다. 민주세력의 복지세력화, 복지세력의 미래세력화, 미래세력의 민주세력화는 그래서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한가? 시간이 없지 않은가? 누가 이 깃발을 들고 새삼 세력을 결집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필요한 것은 희대의 걸출한 영웅도, 특정한 조직도 아니다. 기실 새 역사를 갈구하는 불의 용광로가 있으나, 수없이 배신당한 절망의 시간으로 차디찬 얼음이 되어버린 우리네 마음. 그 얼음덩이를 깨는 데는 바늘 하나면 족하다. 쨍하고 얼음덩이를 두 동강이 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바늘 끝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활화산이 되어 타오를 우리의 새로운 희망을 드러내어 줄 바늘 한 개가 우리 가운데 없겠는가? 한국사가 그리 무기력하겠는가?
그러기 위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껍데기는 제발 비켜서기 바란다. 아니면 도도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압살될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껍데기는 가라!’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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