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아침햇발
선거는 민주적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고대 그리스에선 추첨이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공직 선출 방식이었고, 선거는 ‘과두정치나 귀족주의적인 것’으로 묘사됐다. 이때의 선거는 누구든 뽑힐 수 있는 추첨과 달리, 재산 기준에 따라 공직 입후보나 투표가 제한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런 선거는 민주적이지 않다. 자격 요건 없는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오늘날의 대의 정부도 민주적 특성과 비민주적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선거가 불가피하게 ‘누구나’가 아닌 ‘뛰어난 사람’을 뽑게 된다는 점에선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일 수 있지만, 모든 평범한 시민들이 통치자를 임명하고 해임할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점에선 민주적이라는 것이다.(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거칠게 말해, 평범한 국민들이 자신의 대표를 뽑는 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오늘 끝난다. 경선에선 여러 차례의 연설회와 텔레비전 토론회,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후보 검증 청문회까지 열렸다. 대의원과 당원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선거인단으로 참여했고, 여론조사 결과까지 반영됐다. 과정에선 아쉬움도 많았지만, 우리 정당 정치의 진일보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경선은 과연 민주적인가.
한나라당 경선 선거인단 18만5080명 가운데 대의원은 4만6159명, 당원은 6만9434명이다. 전국 243개 당원협의회마다 대의원 190명, 당원 285명 꼴이다. 지구당별로 수백, 수천명의 조직을 가동해온 한국 정치에선, 국회의원이나 당원협의회 위원장이 쉽게 장악할 수 있는 규모다. 국민참여선거인단 6만9487명도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선거의 승패는 일차적으로 조직에 달려 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국회의원과 당협위원장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일단 줄을 세우면 웬만한 악재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긴 쪽과 진 쪽의 처지가 너무도 다른 탓에, 줄을 선 사람이 ‘올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직된 선거인단이 투표를 했다. 치고받고 물어뜯는 다툼이 없었더라도, 아름다운 민주정치라고 하기엔 어색하다.
다른 문제도 있다. 이번 한나라당 경선이 다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것은, 경선 승리가 곧 대통령 당선이라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그런 예상이 틀릴 것 같지 않다. 역대 대선이 결국은 박빙의 승부였다지만, 그것도 웬만큼 어슷비슷할 때 얘기다. 범여권이 우여곡절 끝에 만든 대통합민주신당 지지율은 고작 7.8%(8월10·11일 <한겨레> 여론조사)다. 50%를 넘는 한나라당과 비교하기 힘들다. 지지부진한 후보 지지율보다 더 심각하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율이 1·2위와 크게 차이 나는 3위였을 때에도, 당시 민주당의 당 지지율은 한나라당의 60% 수준을 지켰다. 그때 같은 역전을 기대하기엔 범여권의 ‘기초 체력’이 너무 약하다. 지금은 전통적인 양당 구도가 붕괴된 형국이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꼭 넉 달 뒤의 대선은 한나라당 경선 결과를 추인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유권자 3710만2천명(2006년 국회 추산)이 뽑아야 할 다음 대통령을, 촘촘하게 조직된 한나라당 선거인단 18만여명이 대신 결정하는 셈이 된다. 나머지 평범한 국민들은 자신들을 통치할 사람을 뽑는 데 실질적인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 자체로는 정치발전인 경선이, 결과적으로 민주적이지 못할 수 있는 이유다. 경선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헌법에 정해진 대통령선거 제도가 양당 체제의 붕괴 때문에 유명무실해지는, 헌정의 위기를 말하려는 것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