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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할머니의 10억원 / 송호진

등록 2007-08-28 17:49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한겨레프리즘
양로원 오르는 길에 핀 들꽃은 하늘거리고, 은퇴한 일흔일곱 수녀님은 뒤뚱뒤뚱했다. “천식 때문에 숨이 차서 ….” 비라도 맞을까 비닐봉지로 한번 더 싼 모카 케이크 상자만은 흔들리지 않게 꼭 쥐었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더는 못 뵐 것 같아서.” 45년 전 성당에서 처음 만난 윤모니카 할머니에게 줄 선물도 직접 털실로 짰다.

“아이고, 아이고!” 혼자 누워 있던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했다. “깜짝 놀라게 하려고 연락도 없이 왔다”는 수녀님의 기습 방문은 꽤 성공적이었다. “죽을 것 같다가도 약이 날 살려내고, 그러니 이렇게 만나네요.” 수녀님이 웃으며 말하자, 할머니는 “여길 어떻게 왔어요? 힘내라고 하늘이 기적 같은 일을 만드셨네요”라며 붙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27일은 할머니가 수십년 전 세례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난 날이었다. 수녀님은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 큰 것 여덟, 작은 초 여덟 개에 불이 붙었다. 깡마른 할머니는 두 번 만에 촛불을 훅 껐다. “내가 여든여덟이라 …. 팔팔하죠?” 농담까지 하는 할머니는 이제 보청기 없이 또렷하게 듣지 못한다.

다른 방 할머니가 손수 만든 꽃 장식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 밑엔 자신이 아끼던 양말 한 켤레도 있었다. “곱다” “예쁘다”는 말과 꽃내음이 뒤섞여 방은 더 향긋해졌다. 한 할머니는 차갑게 얼린 홍시를 사기그릇에 담아 왔다. 수녀님은 “이럴 줄 알았으면 큰 케이크를 사올 걸 그랬다”며 얼굴을 붉혔다.

모니카 할머니는 주스가 잔뜩 남았는데, “주스 드셔야지” 하며 또 한 통을 꺼내 왔다. 숟가락은 가져오고 또 가져와 상 위에 10여개가 쌓였다. 할머니는 요즘 정신이 깜박깜박한다. 한 말을 또 하기도 하고, 애처럼 삐칠 때도 있다. 그러나 이날 할머니는 “참 좋다”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럼 그럼. 욕심내며 살 필요 뭐 있수?”라는 할머니의 말씀과 웃음이 근사하게 어울렸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할머니는 수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폐결핵만 아니었으면, 수녀원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은 하지 못했다. 뭐가 급했는지 서둘러 세상을 떠난 오라버니의 딱한 아들을 품에 안은 건 당연하다 여겼다. 동네에서 옷감을 짜기도 했고, 헌집을 고쳐 되파는 험한 일도 했다. 남을 돕는 데는 통이 컸고, 자신에겐 인색했다. 할머니는 관절이 상한 지금도 먼 정류장까지 걸어가 버스를 탄다.

그렇게 모은 돈과 건물이 10억여원이었고, 2002년 한 대학에 송두리째 건넸다. 상속자였던 조카들도 “그 돈이 우리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할머니는 수녀원이 운영하는 경기도 용인의 양로원 ‘기도의 집’에 자신의 말년을 맡겼다.

할머니는 수십년 전 산 옷을 아직도 입는다. 이날 할머니께 점심을 대접하려고 온 조카 내외는 “좋은 음식 사드리려고 오면 ‘난 터미널 손칼국수와 만두가 제일 맛있다’며 비싼 곳을 불편해하신다”고 했다.


할머니는 가진 걸 나누니 “오히려 내가 구원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난 아이들을 낳아 인성을 갖춘 사람을 사회에 드리지 못했는데 …. 양심적인 인재, 정말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을 키울 수 있게 됐으니 소원이 풀렸다”며 좋아했다. 젊은 시절 여장부 같았다던 할머니는 “이제 육신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말을 하곤 한다.

더 늦기 전에 할머니를 찾은 수녀님처럼, 우리도 “소원을 풀었다”고 굳게 믿는 할머니께 “정말 그러셨노라”고 답할 때가 어서 와야 한다. 양심 있는 인재를 키우고, 그 양심이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과 구별될 수 있는 것. 할머니의 10억원은 그걸 바라고 있다.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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