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40여일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는 탈냉전 시대 한국 외교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제력으로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으나 외교에서는 중간 수준인 나라가 부닥칠 수밖에 없는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21세기 한국 외교의 좌표가 결정될 것이다.
우선 세계화 수준과 외교 자원 사이의 딜레마다. 지난해 한국인 국외여행자 수는 전년보다 15.2% 늘어난 1161만명을 기록했다. 국민 4.2명 가운데 한 명 꼴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외교관 수는 2000명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보다 인구가 적고 경제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의 3분의 1 수준이다. 어쩔 수 없이 곳곳에서 외교 공백이 생긴다. 최근 납치 사건이 잇따르는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나라는 외교 불모지나 다름없다.
둘째, 외교 과제와 역량 사이의 딜레마다. 이번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을 능숙하게 풀어나가려면, 현지 정부를 비롯해 관련국들의 전폭적 협력을 이끌어내고 국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 또한 상대에게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힘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우리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 역량은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에 대처하기에도 한참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분명한 외교 목표와 방식에서 비롯된 딜레마다. 세계는 이미 한국을 상당한 강국으로 생각한다. 한국인을 납치한 탈레반은 애초 한국이 미국과 아프간 정부에 요구해 탈레반 수감자를 석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런 착각의 주된 이유는 우리나라가 그동안 명료한 외교 행태를 보여주지 못한 데 있다. 탈레반은 한국과 미국이 한몸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 사태는 이런 상황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우리 외교는 이제 자원을 확충하고 역량을 키우고 목표와 방식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특히 미국에 편승해 주요 외교과제를 달성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나 독자 역량을 확충하는 쪽으로 분명히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인질 사태에서 얻은 이런 교훈은 오는 10월 초 열릴 남북 정상회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상회담의 의제는 남북 합의서에 명시한 대로 ‘한반도 평화와 민족공동의 번영,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이다. 의제에 대한 협의가 부족했다고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명쾌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평화·번영·통일이라는 세 의제에서 균형있게 실질적 합의를 끌어내는 일이다.
정상회담에서 핵문제에만 집중해야 한다거나 회담을 대선 이후로 연기해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인질 사태의 해결을 미국에 맡겼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과 같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미국의 눈을 통해 보고 미국이 만든 틀 속에 우리 외교를 집어넣으려 하는 근시안적 태도다. 우리가 애써 벗어나야 할 과거로 돌아가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국은 초강대국이지만 때때로 구조적인 문제에서 무력하고 심심찮게 오판을 되풀이한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최근 이라크전 철수를 베트남전 철수에 빗댄 것이 좋은 사례다. 이미 실패한 이라크전에 집착하다 보니 인식과 의사결정 시스템마저 왜곡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얼마 전까지 대북 정책에서도 그랬다.
미국의 잘못된 대테러 전쟁에 무비판적으로 동참한 것이 인질 사태의 간접적 원인이 됐듯이, 미국의 대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한반도 전체가 인질이 될 수 있다. 독자적 외교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남북 관계 역시 핵문제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정상회담의 임무는 엄중하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미국의 잘못된 대테러 전쟁에 무비판적으로 동참한 것이 인질 사태의 간접적 원인이 됐듯이, 미국의 대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한반도 전체가 인질이 될 수 있다. 독자적 외교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남북 관계 역시 핵문제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정상회담의 임무는 엄중하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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