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호/남북관계 전문기자
한겨레프리즘
한반도 정세는 역동적이다. 지난 8월 말의 남북 정상회담 합의가 그렇다. 그 정상회담이 느닷없이 10월로 연기됐다. 국가 장래의 불확실함과 불안함을 보여준다. 이 또한 역동적이지만 불길하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북한은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그 가운데 룡천역 폭발사고와 ‘혁명의 수도’라는 평양이 물에 잠긴 이번 집중호우는 국가관리능력을 위협하고 있다. 미국 국제 인도지원단체인 머시코의 에스머 조 컬버는 지난 6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이 ‘탈진해 가고’ 있다고 느꼈다. 논밭으로 뒤덮인 북한의 산야는 ‘나무가 사라져 홍수와 가뭄에 속수무책’인 땅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가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내겠다는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지난 2004년 5월22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일본인 납치 가족들의 송환을 위해 다시 평양을 찾았다. 그때 김 위원장은 ‘조선의 최종 목표는 비핵화다. 핵개발을 동결하게 되면 검증이 뒤따를 것’이라고 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그 말을 ‘부시 대통령에게 전해도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김 위원장은 ‘반드시 그래 주길 바란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부시와 함께 목이 쉬도록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다. 여러분은 모두 반주를 잘해주기 바란다. 오케스트라는 여섯 명. 그러면 나와 부시의 이중창도 잘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시됐다. 오히려 2005년 초 부시 행정부는 2기 출범을 맞아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몰아세웠다. 2월10일 북한 외무성은 6자 회담 거부와 핵보유 선언으로 맞섰다. 2005년 ‘악의 축’에 이어 ‘폭정의 전초기지’로 나온 부시 2기의 정권교체 전략과 북한의 핵 억지력 확보가 충돌하고 대립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말을 바꿨다. 이라크 내전의 수렁에 빠져 있던 그는 5월 말 “외교든 군사든 둘 중 하나인데 나는 외교적 접근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 김정일 위원장을 ‘미스터 김정일’로 불렀다. 6월10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포기 시 북-미가 ‘좀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정책을 밝혔다. 곧바로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면담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6자 회담에 나오겠다는 뜻과 함께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화답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며 “고이즈미 총리가 왔을 때도 같은 취지로 얘기했다”며 ‘이중창’을 상기시켰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나중에 이 면담을 김 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의 ‘간접대화’라고 했다. 그해 9월 6자 회담에서 합의한 9·19 공동성명은 한국이 만들어낸 6월의 북-미 지도자 간의 이런 ‘의사소통’에서 출발한 것이다.
지난 8월31일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선택과 결단을 촉구했다. 그는 “북핵 문제는 끝나지는 않았지만 끝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7일의 시드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 말이다. 미 백악관 고위관리는 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남북 정상회담 구상과 이를 통한 6자 회담 진전 방안을 듣는 건 아주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5년 6월과 겹쳐진다. ‘부시와의 이중창’이 유효하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의 다음 목적지로 어디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부시 대통령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땐 정동영 장관이 나선 간접대화였다. 이번엔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
강태호/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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