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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진보, 수명 그리고 대선 / 이창곤

등록 2007-09-06 18:00수정 2007-09-06 23:02

이창곤 논설위원
이창곤 논설위원
아침햇발
“역사는 진보하고 있나? 그렇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증거를 대 보라.” 언젠가 한 교수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란 말에 일순 당황했다. 생산력의 확대, 자유와 인권의 신장? 고심하는데, 다행히 그는 곧 답을 제시했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 이보다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나요?” 진보가 삶의 나아짐을 뜻한다면 건강과 수명의 증진만큼 진보의 명확한 증거가 있겠냐는 것이다. (평균)수명은 건강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다. 인간은 유사 이래 이전보다 건강이 좋아졌으며 더 오래 살고 있다.

국민의 사망을 기록해 평균수명을 낸 최초의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 남성의 경우 1541년 평균수명이 기껏 36살 안팎에 불과했다. 1816년께 40살을 갓 넘어서고, 백년 뒤인 1916년엔 50대 후반으로 도약한다. 1997년 이후에는 70살을 훌쩍 넘었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도 근·현대에 들어서 가파르게 올랐다. 1905~1910년 당시 평균수명은 남성 22.6살, 여성 24.4살로 추정된다. 상상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1945년께 50대로 뛰어올랐으며, 2007년 현재 남성은 74.4살(세계 30위), 여성은 81.8살(세계 18위)이다.

수명의 연장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전문가들은 경제성장, 위생, 영양, 교육, 의학기술 등 여러 요인을 꼽는다. 하지만 70년대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위생, 영양 등이 고르게 좋아지면서 이젠 의료보장 체계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인들의 평균수명은 77.9살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일본은 물론 요르단보다 더 낮다. 세계 42위 수준이다. 왜 그런가?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지만 후진적인 의료보장 체계가 수명의 증가를 둔화시키고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최근 개봉된 마이클 무어의 <식코>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미국의 의료보장 체계가 얼마나 이 나라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까발리고 까부순다’. 한 환자가 찢어진 다리를 스스로 꿰매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보험에 들지 못했고, 엄청난 병원비가 무서워 직접 바늘을 든 것이다. 이 환자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미국엔 4800만명에 이른다. <식코>의 인터넷 공식 누리집에 접속하면 마이클 무어의 일갈이 뜬다. “만약 당신이 미국에서 건강을 유지하려면 (무조건) 아프지 말라.” 미국의 문제는 의료를 시장에 내맡긴 민간의료보험 중심의 의료보장 체계에서 비롯됐다. 그 뒤엔 시장에 포섭된 정치와 정치인이 있다. 사실 국가나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의료보장 체계를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선진국이 미국이다.

우린 어떤가? 다행히 국가가 운영하는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료보장 체계도 본질적으로는 미국식의 자유기업형 의료체계에 가깝다. 민간 병·의원들이 주요 의료공급자다. 국민 건강을 온전히 보장하기엔 너무나 미흡한 형편이다. <식코>가 남의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7년 대선이 무르익고 있다. 한나라당 후보가 확정됐고, 대통합민주신당도 15일부터 본경선에 들어간다. 하지만 유감스럽다. 지금껏 국민의 기본권인 건강권 확립과 전 국민의 획기적인 건강증진을 위한 의료체계의 개혁을 주창하는 후보를 보지 못했다. ‘경제성장’과 ‘일자리’만 메아리친다. 성장과 일자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삶의 나아짐(진보)을 원하는 대선후보라면,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민쯤은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이창곤 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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