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한겨레프리즘
긴 추석 연휴를 지나니 남북 정상회담이 일주일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근데 한 차례 연기된 탓일까 정상회담이 마치 추석 대목 다 끝난 뒤 개봉하는 영화 같은 느낌이 든다. 전편의 후광이 너무 큰 때문일까? 아니면 주연배우가 은퇴를 몇 달 앞둔 탓일까? 역사적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지난 7년을 돌아보면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은 물론, 한반도 정세 변화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었다. 우린 또다른 큰 변화를 앞두고 있는 것이다.
예측불허의 1차 정상회담에서 모든 예상을 뒤엎은 것은 바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는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말 그대로 ‘한반도 드라마’의 스타가 됐다. 호색한 등등 과거 그에 관한 정보가 잘못되고 왜곡된 만큼 그 반향도 컸다. 그의 거침없는 언변과 유머가 인기를 끌자 당시 <르몽드>는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 국민들, 김정일 ‘동무’에 반해”라고 쓰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비쳐졌다. ‘말을 너무 적게 한 것 아닌가’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도 잘 모를 정도다. 그렇다면 세계가 김 위원장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김 위원장보다 5년 아래다. 연장자에 대한 깍듯한 예우라며 1차 때 김 위원장이 보여준 파격은 더는 없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세계는 이제 어느 정도 그를 알게 됐다.
1차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의 말은 재치와 적절한 비유로 ‘어록’으로 소개될 정도였다. 돋보인 건 ‘은둔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이다. 정상회담 이틀째인 6월14일 오후 백화원초대소에서 김 대통령을 만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날) 공항 영접에 나온 것은 인사로 한 것인데 구라파 사람들은 나보고 왜 은둔생활 하냐고 하며 ‘김 대통령이 와서 해방됐다’고 그래요. 그런 말 들어도 좋아요.” 농담 같지만 그 말은 의미심장하다.
북한으로서 정상회담은 남북 사이 회담만이 아니었다. 그건 북-중, 북-러, 북-미, 북-일 정상회담과 한묶음이었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 한 달 전인 2000년 5월 중국을 방문했다. 1983년 김일성 주석과 함께 방중한 이래 17년 만이다. 92년 한-중 수교로 불편했던 북-중 관계의 복원을 꾀했다. 또 정상회담 한 달 뒤인 7월, 이번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을 찾았다. 러시아 지도자의 북한 방문은 러시아 혁명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러시아와 관계에서도 북은 한-소 수교를 맹비난했다. 원조 중단과 대러 채무 문제 등으로 두 나라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돼 있었으나 일거에 바꿨다. 김 위원장은 그 뒤 2001년 1월에 이어 2004년 4월, 2006년 1월 등 모두 네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2001년 1월 상하이 방문에서의 ‘천지개벽’ 발언과 2006년 1월 중국 남부지역의 이른바 북한판 남순강화 등은 개혁·개방을 위한 협력을 의미한다. 또 2001년 7월 한 달 남짓 시베리아 여행 끝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2002년 8월엔 블라디보스트크에서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무엇보다도 남북 정상회담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조명록 차수의 상호 방문으로 이어져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열어가는 디딤돌이었고, 예정됐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의 방북은 무산됐지만 그 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 넘어가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두 번의 평양 북-일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정상외교를 연결하는 중심 고리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북한한테 남북 정상회담은 ‘은둔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전방위 외교의 본격화였다. 그건 냉전 해체기의 위기와 고립에서 벗어나 탈냉전의 흐름에 적응하려는 선택이었다. 이제 그 뒤를 이은 ‘한반도 드라마’ 제2막이 오르려 하고 있다.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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