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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05 21:43 수정 : 2005.04.05 21:43

복지부는 급속한 고령화에 대처하기 위해 71살 이상(1933년 7월 이전 출생자) 저소득층 노인에게만 지급하는 경로연금을 65살 이상으로 확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20만8000명의 노인이 월 3만~3만5000원의 경로연금을 새로 받게 된다. 그 총액은 어림잡아 계산해보더라도 월7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몇 살부터를 노인이라 해야 하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법적 노인 연령 65살 규정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1800년대 후반 비스마르크 독일 총리의 규정을 1940년대 유엔에서 차용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 65살 노인 규정이다.

그러면 비스마르크의 시대인 1870~1890년대와 세계대전을 겪은 1940년대, 거기에 과학과 의학이 최고조로 발달한 2000년대의 인간 평균수명은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굳이 여러 문헌을 뒤져 사십몇살이 그때 평균수명이었고 지금은 거의 두 배에 달하는 80살 안팎이라는 수치를 제시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집안에 환갑을 맞이하는 어르신이 계시면 잔치를 크게 벌일 정도로 모두 축하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환갑잔치 하는 경우를 보기는 정말 드물다. 뿐만 아니라 칠순 잔치조차도 우세스럽다 할 정도로 장수하는 어른이 많아졌다. 그런데 65살이 노인이라니?

65살이면 자식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새롭게 꾸며볼 때이다.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인 것이다. 65살을 위해 정부가 무엇인가 하고 싶다면 그들을 노인취급하고 푼 돈 얼마를 쥐어 줄 것이 아니다. 그런 퍼주기식 복지는 진정한 복지가 아닐 뿐 아니라 ‘노인은 사회 경제의 적’이라는 인식, 또는 사회의 고령화, 곧 노인이 많아지는 것이 사회악의 시작인양 오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일거리와 일자리요, 동냥이 아닌 내 손으로 벌어들인 일정한 수입인 것이다. 인간이 주는 먹이를 새장 속에서 받아먹기만 하는 새는 진정한 자유의 상징이 될 수 없듯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풍요로우면 풍요로운대로 궁핍하면 궁핍한 대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립 의지를 가진 노인의 자립을 도와주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달 지출될 수십억에 달하는 추가재정으로 새로운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65살은 경로연금을 받을 나이가 아니라 왕성하게 일할 나이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자체가 재정적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는 정부의 자세가 재정적자를 부르는 요인이라는 것이 노인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복지 선진국인 일본이나 서구의 경우를 보더라도 재생산이 없는 단순 지출의 복지는 밑 빠진 독의 물붓기이다. 비단 이번 정부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는 늘 ‘아랫돌을 빼서 윗구멍을 막는’ 식의 정책만을 구사해 온 것이 사실이다. 당장 배가 고프다고 해서 씨종자까지 모두 먹어 버려서야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홍정구/프리랜서 작가·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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