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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영어날’에 맞이하는 한글날

등록 2007-10-08 18:20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기고
국경일로는 두번째로 쇠는 한글날을 맞았다. 한글날이 국경일로 되었을 뿐 경축식만 끝나면 곧바로 영어날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 날이 갖는 깊은 뜻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글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란 찬사를 넘어 인류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날 우리는 한글이란 가장 훌륭한 도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돌보지 않았다. 글자란 곧 한자를 가리켰고, 학문과 교육 행정에는 한문만 써야 하는 줄 알았다. 한자가 거룩한 성인의 말씀을 적은 글자라면, 한글은 ‘언문’ 곧 속된 나날의 말이나 적는 글자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물을 이렇게 가장 졸렬하게 운용한 것은 문화의 지향점을 늘 중국 한족 문화와 비슷해지는 데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각이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최근 대학에서는 영어강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명문이라는 대학일수록 앞으로 몇 해 안에 영어 강의를 얼마만큼 늘리겠다는 걸 큰 자랑으로 알고 앞다투어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대학 평가에서도 국제화 부문에 영어 강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점수를 달리 매긴다. 민족사관을 내세우면서도 영어로만 가르치는 고등학교도 있고, 국제 중학교에서는 영어로만 수업을 한다. 여러 곳에서 영어 몰입 교육을 하고, 제주도에 12곳이나 되는 영어 전용 학교를 세울 것이라고 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데서 우리말과 글을 배제한다는 교육의 지향점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언문 시대’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 영어를 배우려는 우리의 열정에 미국인들마저 ‘경탄’하고 있다. 어느 미국 신문의 표현대로 영어가 ‘미래를 보장’하는 사회에서 미국 원정 출산과 조기 유학은 늘 수밖에 없고, 영어 마을과 영어 도시를 만들겠다는 지자체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아파트 이름이며 상품 이름이며 가게 이름에 영어 아닌 것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 현실은 점점 미국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처럼 여겨진다. 이는 무서운 자기 망각이요,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다. 영어 배우기, 특히 말하기는 우리에게 지고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미국말을 한다는 이유로 원어민 강사는 자질이 모자라고 자격이 없어도 돈을 쉽게 벌고 임금 노릇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극심한 영어 숭배의 뿌리는 영어 말하기를 장래를 보장하는 장치로 만든 여러 제도에 원인이 있다. 대학의 영어 강의가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함은 물론, 미국 학위에 대한 지나친 선호도 재고해 봐야 한다. 영어 마을, 영어 도시 세우기는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각종 국가 고시에서 영어의 비중이 너무 높지 않은지,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기업에서도 무턱대고 영어 말하기를 직원 모두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전담 인력을 기르는 것이 현명하다. 돈을 들여서라도 영어를 쓸 환경을 인위적으로 만들 것이 아니다. 영어 쓸 곳을 줄이자. 경제적으로도 우리는 이미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산출한 우리나라의 영어 사교육비는 일본의 세 배인데, 한 사람당 비용을 계산하면 일본의 여덟곱절에 가깝다. 토익·토플 응시자 수가 우리나라가 제일 많고, 미국 유학생 수도 우리가 제일 많다. 그런데도 성과는 신통치 않다. 이런 식의 영어 공부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유치원 영어 교육을 넘어 영어 태교까지 간 오늘날의 영어 숭배 현상은 언어학자들의 관심을 넘어 인문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능동적인 관심과 성찰을 요구하는 현상이다. 한글날은 우리 문화와 삶의 방향을 음미하고 새로 세우는 좋은 계기다.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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