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4.06 19:32
수정 : 2005.04.06 19:32
‘일본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며 일본정부를 비판하고, 한국의 입장을 옹호한 일본인의 글이 한 포털사이트의 토론방에 오르면서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다고 한다. 3일 현재 조회수가 약 17만명에 댓글이 1500개라니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왜 사람들은 그 글에 열광했을까? 아마도 메아리 없는 우리의 주장에 답한 매우 드문 일본인의 공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이 공명의 글을 읽었다. 그러나 ‘제발 일본인을 닮지 말라’는 당부로 끝나는 그 글을 읽고 나서, 기분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부정적 일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부정적 일본’이 있다. ‘원숭이라도 아는 역사문제를 아직도 해결 못해서’ 빈축을 사는 일본과 같이 우리도 너무나 단순한 역사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심적 일본인들의 글을 읽으며 가슴시원해 할 때 아마 일본의 기득권 집단들은 아직도 식민사관에 젖어있는 ‘정신 제대로 박힌(?)’ 한국 지식인의 글을 읽으며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성숙하여 이런 문제가 나오면 우리부터 되돌아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에 당당하기 위하여 우리안의 부정적 일본, 즉 친일의 역사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안의 일본은 친일파 청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과거사 청산을 넘어 ‘우리안의 일본’을 청산해야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보여주듯이, 일본은 우리를 지배할 때 물질로만 지배한 것이 아니라 정신으로 지배했다. 정신을 지배당한 우리의 기득권 집단들이 사회의 전반을 장악하였고, 이들에 의해 식민사관이 재생산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 의해 재생산된 부정적 일본이 우리의 일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남아있는 보다 중요한 우리안의 일본은 ‘우리안의 파시즘’이고 ‘우리안의 서구중심주의’이다. 아직도 없어지지 않는 조회에서, 최근에 다시 강화되는 아이들의 복장 단속에서 우리는 전체주의를 재생산하고 있다. 군국주의 시기 일본의 교육칙어를 본 따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었다고 박정희를 비난하지만 우리안의 일본이 재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눈감고 있다.
일본에 대한 지적 복종은 서구에 대한 지적 복종, 보다 정확히는 미국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으로 나타난다. 미국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더 대북적대적인 담론의 양산은 현해탄 콤플렉스가 태평양 콤플렉스로 변화된 것이다. 마치 일제시기, 선진문물이라며 일본의 사고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듯이 미국에서 유행한다며 경쟁과 효율의 담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분노는 쉽다. 그러나 분노를 넘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다. 일본에 분노하는 것은 쉽지만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듯이 친일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은 어렵고, 그것을 넘어 ‘일상의 일본’을 청산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분노에만 머문다면 분노는 절망을 낳을 뿐이다.
분노를 넘어 ‘우리안의 일본’을 극복하는데 일본의 현실은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최근 일본이 보수우경화한 것은 일본의 시민사회가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강한 풀뿌리 운동의 전통을 가진 일본의 시민사회가 보수화된 데는 10년간의 경기침체 등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민사회의 진보적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정치집단이 부재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자민당과 사회당의 1.5당 체제, 사실상 보수 일색의 현재 정당체제는 그 어떠한 다른 목소리도 봉쇄하면서 일본의 보수우경화를 이끌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현재 정당체제는 ‘우리안의 일본’을 재생산하는 세력들의 일당지배체제 아닌가?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안의 일본’을 극복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닌가? ‘우리안의 일본’을 극복하려는 시민사회가 직시해야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김정훈/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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