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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효순칼럼] 일본이 가면을 벗을 차례

등록 2007-10-28 17:52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 대기자
김효순칼럼
지난주 국정원 과거사위가 기자회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이상한’ 모양새로 조사결과를 공개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73년 8월 도쿄의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저명한 정치인을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납치해 온 사건의 진상이다. 누가 납치를 기획·실행했고 최상위 지시자가 누구인지가 핵심이다. 둘째는 진상 은폐와 관련된 부분이다. 사건 직후 한국 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났는데도 한국과 일본의 수뇌부가 그냥 덮기로 하고 정치적 봉합을 한 과정에 대한 규명이다. 셋째는 정치적 봉합과 짝을 이루고 있는 각종 추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나카 가쿠에이 당시 일본 총리에게 거액의 정치헌금을 보냈다는 주장과, 당시 한국에 대한 경협자금 집행에 깊이 관여했던 자민당내 수구보수파와 박정희 정권 사이의 유착 등이 큰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이번에 과거사위가 밝힌 조사보고는 주로 첫째 부분에 해당된다. 요지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납치사건을 저질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는 문서를 찾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묵시적 승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조사결과라면 특별히 새로울 것도 없는 셈이다. 사건 관련자들의 고백이나 유출된 중정문서에서 대체로 알려진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씨의 생환 과정에서 미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실을 했는지, 일본은 어디까지 사태를 파악하고 대처했는지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과거사위가 한-일 양국 정부와 일부 정치권의 발목잡기에 시달리면서도 사건의 본체를 국가정보기관의 범죄행위라고 못박은 것은 평가를 해야 한다. 동시에 사건의 진상을 꾸준히 추적해온 시민단체나 언론의 노력이 조사결과 공개에 일조를 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아사히티브이>가 지난 6월 중순 일요 시사프로 ‘더스쿠프’에서 다룬 김대중 납치사건은 그런 사례의 하나다.(<한겨레21> 7월3일치 666호 참조)

특집 프로가 공중파를 타기 며칠 전, 석 달 동안 취재를 전담했다는 한 일본인 기자를 만나 부담 없이 나눈 얘기가 지금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젊어 보여 나이를 물었더니 납치사건이 벌어진 해에 태어났다고 했다.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각종 자료들을 훑어보고 사건 관련자들을 쭉 찾아다닌 그의 소감은 “비밀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이상해졌다”는 것이다. 내막이 복잡하고 증언이 엇갈리니 가닥을 잡기가 쉬웠을 리가 없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그는 느닷없이 “누가 가장 나쁜 사람이냐”고 물었다. ‘어린애 같은 표현’을 쓰면 나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누가 가장 나쁘냐? 납치를 실행한 자, 지시한 자, 진상규명을 포기하고 정치적 봉합을 서두른 일본 정부,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대통령 재임 중 사건을 파헤치지 않은 김대중씨의 책임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나쁜 사람이 많이 있다는 그의 말처럼 이 사건은 여러 측면을 안고 있다. 내막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해서 뒤처리를 얼버무리는 것은 옳지 않다. 가장 심각한 것은 한국의 국가기관이 남의 나라에 가서 백주에 사람을 납치해 온 점이다.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점에 대해서는 겉치레 유감표명이 아니라 분명하게 사죄를 해야 한다.

나아가 사건의 진상규명이 이렇게 늦어진 일차적 책임이 한국 정부에 있다고 해도 일본 정부 역시 은폐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과거의 어두운 치부를 철저히 드러내는 것이 새로운 한-일 관계 건설을 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이제 일본 정부가 가면을 벗을 차례다.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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