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 논설위원
유레카
욕망은 예부터 예술의 무궁무진한 자양분이었다. 성욕·명예욕·소유욕·지배욕 등…. 갖가지 양태의 이 본능은 예술가들에 의해 드러나고 새겨지면서 일찍이 주인공 자리에 올랐다. 동서양 걸작의 대부분은 욕망의 형상화와 변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긴 인간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 치고 욕망을 등장시키지 않고서 재미는 둘째 치고 가능하기나 할까?
철학이 욕망을 홀대한 건 의외다. 철학은 근현대에 이르러서야 이 변화무쌍한 주인공에 깊은 탐침을 찔러댔다. 푸대접에는 이유가 있다. ‘이성’이란 대스타의 장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이성 중심의 세계관에서는 욕망은 부정적이며 통제 대상일 뿐이다. 그 발현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칸트는 올바른 인식은 이성적 사유에 의해서만 진정 가능하다고 보았다.
식욕(마르크스), 성욕(프로이트), 권력욕(니체) 등이 세기의 사상가들에게서 주목받으면서 때늦게 욕망을 탐색한 현대철학은, 저술가 남경태에 의하면 실존철학과 구조주의다. 하이데거는 욕망을 관심으로 규정하고, ‘우리가 접하는 세계는 그래서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관심에 의해 물들어 있는 영역’이라고 설파했다.
구조주의의 눈엔 욕망은 무의식이다. 자크 라캉은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결핍’이라고 정의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려는 무의식적인 의지’라고 했다. 욕망은 더는 부도덕한 것도 통제대상도 아니었다. 흘러가는 물이었다.
우리 사회의 시선은? 좋은 욕망도 있고, 나쁜 욕망도 있다고들 말한다. 절제란 둥지가 필요하다는 이들도 적잖다. 속내를 보면 부정적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각자의 몫이고 선택이며 책임이다. 더 큰 문제는 이중성이 아닐까. 자신엔 너그럽고 다른 이에겐 매서운, 굴절된 욕망의 시선이다. 신문과 방송에는 오늘도 욕망의 실타래에 얽힌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창곤 논설위원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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