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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학교육을 침식하는 기업들

등록 2005-04-07 21:17수정 2005-04-07 21:17

매 학기마다 개강을 하면 수강생 가운데 졸업을 한 학기 앞둔 학생들이 찾아와서 취업계를 낸다. 학생들은 취업을 해서 수업을 들을 수 없지만 졸업은 해야하니 출석을 못하더라도 F학점은 받지 않게 해달란다. 학생들이 학점을 거저 달라는 건 아니다. 출석을 대체하는 리포트를 작성하겠으며 시험도 보러 오겠다고 한다. 출석도 않는 학생에게 학점이라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취업란의 시대에 애써 취직한 학생에게 그 학교 선생이 야박하게 굴 수는 없는 일이다. 적당히 리포트를 써오면 좋은 학점은 아닐망정 F학점을 주지는 못한다.

이런 교수와 학생의 모습은 이제 대학에서는 흔한 풍경이지만 대학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졸업예정자가 취업을 미리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학업을 마저 마치지도 않고 직장에 나가서 일한다는 게 무슨 이야기냐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대학생들을 졸업 전에 채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 전에 데려다가 인턴사원이라는 명목으로 일을 시킨 지는 오래되었다.

대학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기업의 관행은 괘씸하기 그지없다. 졸업을 한 학기나 남은 학생을 데려다 쓰는 것은 말이 좋아서 인턴사원이지 그들을 적어도 한 학기 동안은 싸게 부려먹으려는 수작일 뿐이다. 더 불쾌한 것은 이런 관행 밑에 깔려 있는 기업의 대학관이다. 기업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대학에서 한 학기 더 배워봐야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업 쪽의 생각이 고약하지만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대학에서 한 학기를 더 배운다고 해서 얼마나 큰 향상이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배움의 중요한 이유가 직업을 얻는 것에 있는 바에야 직장에서 일을 배우는 것이 더 빠르고 좋을 수 있다. 그리고 기업관계자들이 입만 떼면 앵무새처럼 떠들어대듯이 우리나라 대학이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대학교육의 재구조화를 위해서 대학과 기업계와 정부가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옳다. 열악한 대학교육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기업의 요구를 대학은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 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관건은 교육과 직업훈련을 어떻게 준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개별 기업마다 극히 다양할 수밖에 없는 요구를 대학이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기업 특수적인 지식과 기술은 직업훈련의 몫이며, 그것을 위한 비용은 기업이 지불해야 한다. 대학교육이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직업세계에 응용가능한 지식과 안목과 판단력의 양성이다. 현재의 대학교육의 문제는 개별 기업의 특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현장에 대한 적응력과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해서 필요한 것은 대학과 기업이 각자 해야 할 몫을 서로 협의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시장에서의 우월한 힘을 통해 기업이 대학교육을 침식하는 짓거리이다. 학생은 수업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학점을 간청하고, 교수는 수업에 나오지도 않는 학생에게 학점을 주는 상황에서 교수가 어떻게 자긍심과 열정을 가지고 교육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학생이 대학교육을 겉치레 이상의 것이라 여길 수 있겠는가?

강자이며 단기적으로는 이익을 보고 있는 기업들이 이런 관행을 쉽사리 고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라도 대학이 자위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전국 대학총장들이 힘을 모아, 졸업하지 않은 학생을 데려다 쓰는 일을 막았으면 한다.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선다면 대교협도 대학사회에서 신망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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