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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이순신 / 김지석

등록 2007-11-18 18:39

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 논설위원
유레카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하고, 왜군이 제해권을 장악한다. 며칠 뒤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1545∼98)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이제 육전에 힘쓰라’고 명한다. 수군이 살아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자 이순신은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고(尙有十二) …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微臣不死)”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린다. 미신(微臣)은 ‘미천한 신하’라는 뜻이다. 그는 이 12척으로 두달 뒤 330여척의 왜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둔다(명량대첩).

이순신의 영광과 고난의 뒤에는 항상 유성룡(1542∼1607)이 있었다. 31살에 무과에 급제한 뒤 하급직을 떠돌던 이순신은 1591년 좌의정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정3품)가 된다. 다음해 임진왜란이 시작돼 두 사람이 공을 세우자 정적들의 모함 또한 거세지고, 선조도 두 사람을 제거하는 쪽에 서게 된다. 이순신이 왜란이 거의 끝난 1598년 11월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숨진 것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타당해 보인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가 주인에게 삶아먹히듯이(토사구팽) 난이 끝난 뒤 당쟁의 희생물이 되기보다 장엄하게 전사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영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은 같은 날 관직을 삭탈당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지난해 말 강연에서 ‘상유십이 순신불사’(‘순신’은 ‘미신’의 잘못임)라는 문구를 떠올릴 때마다 전율 같은 감동을 느낀다며 대선 출마 뜻을 내비친 바 있다. 그는 이후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으나 결국 말을 뒤집었다. 이순신은 국난과 당파싸움이 심각하던 시기에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죽음까지 담담하게 받아들임으로써 불멸의 영웅이 됐다. 그는 이회창 후보가 자신의 말을 사용(私用)한 것에 얼마나 공감할까.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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