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종/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객원논설위원칼럼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날 두 장의 사면장에 서명을 한다. 경제 거물 두 사람을 감옥에서 풀어주라는 명령서. 이임식 참석 직전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임무 수행이란, 비서실장이 주선한 퇴임 후의 노후 보장 대책. 다름아닌 불법행위로 구속된 경제계 거물급 인사와의 천문학적 숫자의 뒷거래. 물론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심한다. 대통령은 사치스러운 생활이 보장되는 퇴임 후의 노후 생활에 대한 달콤한 유혹과 하이에나같이 물고 늘어질 언론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하는 불안감 사이에서 깊이 고민한다. 장기간 은밀하게 진행해온 탓에 철저한 비밀보장을 장담한다는 정치적 심복 백악관 비서실장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이제까지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다는 우려에 대통령은 최후의 시간까지 선택을 미룬다. 존 그리샴의 소설 첫머리다.
대충 이렇게 시작하는 것으로 기억되는, 몇 해 전 읽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오른다. 대통령의 임기 막판에 터진 재벌그룹의 대형 비리 사건을 조사할 특별검사법 도입에 대한 청와대의 거부권 행사 발언이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시작된 삼성그룹 비리의혹 사건, 한국사회 양심의 상징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재등장, 시민단체와 민변의 고발, 사제단의 발표에 대한 검찰·재경부의 반박, 이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 국회의 특검법 통과, 청와대의 특검법 거부권 행사 발언, 돈 앞에 무릎 꿇은 언론들의 초라한 행태, 우리은행의 삼성직원 불법계좌 조회 수사 중단 ….
공룡 같은 대기업과 피해자인 소시민과의 싸움은 존 그리샴 작품의 단골 주제였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서민들을 농락하는 대형 보험회사, 담배의 중독성과 위해성을 은폐하고자 가능한 모든 불법·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대형 담배회사, 개발이 제한된 보호지역에서의 유전개발을 위해 대법관도 암살하는 석유재벌, 마피아의 돈세탁을 위해 동원되는 법률회사와 같은 소재를 바탕으로 결국은 정의가 이긴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존 그리샴이라면 내부 고발자와 전직 청와대 비서관의 양심고백, 종교인들의 고발, 세계적인 재벌그룹 총수 가족의 비리와 같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소설적 소재들이 현실에서 한꺼번에 등장하는 삼성그룹 비리의혹 사건에 작가로서 매혹될 것이다. 부패한 정경유착을 치밀하게 해부하여 그들의 종말을 논리적으로 실감나게 파헤치는 게 그의 특기이니까. 존 그리샴이 아무리 대기업 비리사건에 익숙한 작가일지라도 천주교 사제단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부패한 한국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천주교 사제단 발표를 보면, 정치권·사법부·관료사회·언론기관 등 권력층에 삼성그룹에서 광범위한 뇌물을 뿌려왔다고 한다. 또한 많은 노무현 정권의 정책들을 삼성그룹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그 결과 시민단체가 아무리 삼성그룹을 고발해도 이건희 회장 일가는 건드릴 수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들이 어려울 때 직접 나서서 흑기사 노릇을 자처했다고 한다. 이런 정도로 한 재벌 일가의 탐욕이 사회 전체를 뿌리째 오염시키고 있다는 현실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소설을 구상하겠다면 그간의 <한겨레> 보도와 지난주 방영된 <문화방송> ‘뉴스후’ 같은 프로그램을 먼저 챙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과연 삼성 비자금 특검법 거부권 행사에(혹은 자신의 특별한 노후대책에) 서명을 할까 안 할까? 존 그리샴의 결론이 궁금하다.
김상종/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