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마을
연필을 깎는 동안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아내도 새끼도 없이
대구 뉘 집인지 모를 데를 기웃거린다
아주 오래 깃들여 산 듯이
마당부터 마루부터 부엌부터가
반질반질 눈에 익다
붉고 따뜻한 아궁이 불이 자서
부뚜막이 알맞게 식고,
불 켜진 방에는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무슨 심산가
정작 집에 닿아서는 집을 등지고
세상의 불빛 아득히 건너다본다
먼 어둠 너머
나를 등지고 내게로 돌아오는
연필을 깎는 동안
-시집 <치워라, 꽃!>(실천문학사)에서
이 안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1999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목마른 우물의 날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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