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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인의마을] 달을 지나다 / 류외향

등록 2007-12-16 18:26

시인의마을
붉은 비가 내렸다 북방한계선을 따라 군락을 이룬 자작나무들이 간신히 열매를 붙들고 있던 때였다 만월이었으나 밤의 깊은 골짜기까지 빛을 뿌리지는 못했다 나는 알몸으로 산속을 떠돌고 있었다 사물들이 수초처럼 흔들렸다 늙은 시간들이 땟물 흐르는 손을 내밀었으나 아무것도 내어줄 것이 없었다 손바닥을 적신 빗물이 이내 붉은 손금으로 박혔다 내 몸의 신열이 찬 대기를 달구며 밤하늘 저편으로 외롭고 적막한 심사를 타전했으나 첩첩 어둠 속으로 누군가의 부음만 날아들었다 만월은 손쓸 새 없이 붉은 살을 도려내어 지상에 떨구었다 산중의 것들 진저리치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자작나무 흰 수피가 붉은 비에 젖어들었다 물 얼룩 근처에서 사라지는 상징들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는 지상의 시간들이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릴 때 붉은 말(言)이 붉은 길을 지나 사타구니에서 빠져나왔다 내 최초의 아이가 또랑또랑 눈을 뜨고 밤길을 걸어갔다 산을 미처 다 빠져나오기도 전에 다시, 붉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집 <푸른 손들의 꽃밭>(실천문학사)에서

류 외 향

1973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1999년 계간 <시안>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꿈꾸는 자는 유죄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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