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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기독교 복음주의와 사형제도 / 나희덕

등록 2008-01-13 18:54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세상읽기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마이크 허커비가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하고 있다. 침례교 목사인 그는 낙태와 동성애 등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 교리의 확고한 대변자라고 할 만하다. 기독교라는 바탕 위에 세워진 미국에서는 이처럼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쟁점화하는 것이 정치적인 결집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활용되곤 한다. 복음주의의 지지가 없었다면 부시 대통령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나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복음주의가 낙태는 반대하면서 사형제도는 찬성한다는 사실이다. 태어나지 않은 생명까지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형이라는 합법적이고 제도화된 살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모순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생명을 부여하고 거두어가는 것이 오직 신에게 속한 일이라고 믿는다면 정부나 법률제도를 통해 인간이 인간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는 것은 그 신성에 도전하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복음주의는 ‘교화’보다는 ‘보응’을 강조하며 피의 값을 피로써 치르는 사형제도를 옹호해 왔다.

한국 개신교 내부에서도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 사형제도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편이다. 사형제도뿐 아니라 남북문제, 국가보안법 등에 대해서도 양쪽은 견해가 다르다. 기독교인인 새 대통령 당선인도 후보 시절에는 범죄 예방을 위해 사형제도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대통령 당선인이 17대 국회에 계류 중인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특별법’에 대해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난 10년 동안 사형이 한 건도 집행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지난해 12월30일 국제사면위원회에 의해 실질적인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었다. 이미 15대 국회부터 발의된 이 법안은 현재 175명의 의원이 서명하고 동의한 상태다. 법률적으로도 사형폐지국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분단과 독재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얻어낸 성숙한 인권의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인혁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8명의 사형수를 비롯한 여러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사형제도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위험성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남용할 의도가 없었더라도 판결의 오류 가능성은 늘 남아 있고, 잘못된 판결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사형제도가 지닌 문제점 중 하나다. 어떤 법률학자는 우리나라의 범죄수사가 진술에 주로 의존하는 편이고 수사와 관련된 업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그 오류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강도 높은 장치로 사형제도를 둔다고 해서 범죄율이 실제로 줄어들지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형제도는 효용성보다 위험성이 더 큰 제도라 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여러 자리에서 사랑의 윤리에 기초해 화합의 정신을 살려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첫 단추가 사형제 폐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를 당선시키는 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기독교가 세상에 알려야 할 ‘복음’이란 모든 생명은 존귀하며 교화와 구원의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의 복음주의가 미국의 복음주의가 지닌 패권의식을 답습하지 않고 열린 종교로 나아가기 위해서도 사형제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예수가 사형제도를 찬성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현명해서 우리처럼 멍청하게 선거판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대답한 허커비처럼 얼렁뚱땅 넘기지는 말아야 한다.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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