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경제평론가
시론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가더라도 결코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서산대사의 말씀이다. 눈밭에 남은 발자국은 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도 가벼이하지 말라는 뜻일 텐데, 특히 역사적인 결정은 따로 말해 무엇하랴.
지금 국회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놓고 실랑이 중이다. 내 보기에 이 협정은 건국 이래 최대의 정책이다. 2년여 안간힘을 쓰던 반대의 목소리가 지치고 지쳐 잦아들 즈음에도 국민의 절반이 여전히 회의를 표했다.
우리뿐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운명까지 결정할 이 어마어마한 협상이 얼마나 졸속으로 시작되고 불공정한 결과를 낳았는지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당장 검색엔진으로 2년 동안의 기사를 검색해 보라. 반대파의 우려는 불행히도 고스란히 현실이 됐고 정부의 호언장담은 거의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명박 차기 정부는 마구잡이로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앞으로 경제자유구역이 더 지정되는 것은 물론 ‘전국토의 준특구화’가 이뤄질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광역클러스터 정책도 실은 수도권 규제 완화를 노린 것이다. 이런 정책이 부동산 투기 등 온갖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더라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되돌아갈 길을 끊어 버린다. 경제자유구역은 ‘현재 유보’에 포함돼 있어서 ‘역진 불가능’ 조항이 적용되고 이 지역들에 미국 자본이 투자한다면 그때부터 투자자 국가소송제가 적용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건강보험을 걱정하는 반대론자에게 ‘괴담을 유포시킨다’고 비난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민간보험 확대, 당연 지정제 폐지는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시코>(SiCKO)가 곧 우리의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증명한다. 더구나 미국은 바야흐로 장기침체에 들어가고 미국발 금융위기의 불똥은 전세계로 번지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우리 경제를 지킬 방화벽마저 무너뜨린다. 우리의 삶이 국보 1호 숭례문처럼 되기를 바라는가?
정부는 엉뚱하게도 우리가 먼저 비준을 해야 미국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힐러리, 오바마 등 유력주자가 반대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미국 의회가 먼저 비준할 가능성은 ‘0’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미루는 연간 기회비용은 15조원이 아니라 당연히 0원이다. 멕시코가 미국에 앞서 ‘나프타’를 비준한 후 미국 의회는 설탕의 수입금지를 요구해서 관철시켰다. 먼저 비준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마지막 무기마저 내팽개치는 일이다.
오바마는 미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들이 서민의 삶을 개선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정곡을 찔렀다. 현재의 미국형 자유무역협정은 두 나라 거대자본의 배만 불릴 뿐, 사회의 공공성을 여지없이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재검토 기간에 우리 국회도 국정조사를 통해 정말 꼼꼼히 협정문을 파헤쳐서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정말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일반 국민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하는가? 협상안을 제대로 읽어보기라도 했는가? 비준안에 서명하는 것은 역사의 눈밭에 발자국을 찍는 것이다. 총선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도 당당하다면 왜 무기명 비밀투표로 발자국을 지우려 하는가? 당신의 자랑스러운 결정을 역사에 생생하게 남겨서 후세의 귀감으로 삼을 일이다.
정태인/경제평론가
정태인/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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