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
유레카
‘매뉴얼’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제품의 사용설명서다. 매뉴얼을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정보·통신 기기의 사용설명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악명이 높다. 둘째는 교본 또는 교범이다. 특정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책자다.
대표적인 매뉴얼이 야전교범(Field Manual)이다. 예상되는 각종 상황에서 군인들이 해야 할 행동을 체계화한 것으로, 신체 각 부분의 동작과 초 단위 시간계획까지 들어 있다. ‘에프엠(FM)대로 한다’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 육군은 500종이 훨씬 넘는 야전교범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매뉴얼은 꼭 필요하지만 그대로 하는 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모든 상황을 다 상정할 수도 없거니와 개인의 대응 능력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매뉴얼에 얽매이다 보면 창의성이 떨어져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매뉴얼 세대’라는 말도 이런 부정적 어감을 갖고 있다. ‘매뉴얼에 맞춰 조작되는 기계처럼 자율성과 판단력을 잃어버린 채 비슷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매뉴얼 세대다. 일본에서 197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에 대해 쓰였다.
그래서 매뉴얼을 숙지하고 몸에 밸 정도로 연습하되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실수가 적다. 매뉴얼에 나온 개별 행동뿐만 아니라 기본원리 및 사회적 가치까지 체화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문화재 재난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이 있었으나 숭례문 화재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비슷한 일의 재발을 막으려면 실효성 있는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매사에 규정을 앞세우는 답답한 ‘매뉴얼 사회’가 돼선 안 되지만,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매뉴얼의 정비 수준은 사회발전을 재는 한 척도라 할 수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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