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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태안사태 수습에 역행하는 특별법 / 장기욱

등록 2008-02-26 19:52

장기욱/변호사
장기욱/변호사
기고
태안 앞바다 오염으로 생계를 잃어버린 주민의 고통을 보듬고자 각계에서 촉구했던 ‘태안 지원 특별법’이 지난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원안에서 애초 담았던 핵심 내용이 다 빠져버려 특별법의 의미가 퇴색했다. 태안 사태의 수습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칫 현행법보다 해결에 더 차질을 가져와 사태 수습에 역행할 요소마저 있다. ‘대안’으로 고쳐 상정된 특별법안은 너무도 미흡할 뿐 아니라 독소 조항이 담긴 악법이다.

지난 1월 말 여야 4당 의원 253명이 발의한 법안에는 가해자 쪽에 국제기금 보상한도액을 초과하는 배상금과 환경복구자금을 물리는 핵심 내용을 담았다. 이를 위해 손해배상의 범위에 관한 전향적인 규정이나 신속합당한 배상 책무의 원칙을 규정했고, 당국이 피해자의 손해액 증거조사 등 배상청구권 행사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한다든가 피해지역에 대한 각종 지원사항을 명시해, 비록 피해민들에겐 턱없이 미흡하고 아쉬우나마 나름대로 사태수습을 위한 특별법의 꼴은 갖춘 상태였다.

그런데 이 법안이 상임위인 농림해양수산위와 심사소위를 거치는 동안 법안의 주요 부분들을 적절한 변경 논의 절차도 없이 누락한 채 해양수산부 쪽의 견해와 주장을 ‘대안’이라고 이름 붙여 19일 위원회를 통과시켰고, 22일 본회의에서 그대로 의결해 버린 것이다. ‘대안’이라는 이 법안의 독소조항을 살펴보자.

삼성중공업의 무모한 중과실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직무유기라는 비판을 받는 검찰조차도 해상크레인 바지선단이 유조선을 ‘선박파괴’한 사실로 기소했건만, 통과된 법률안에서는 ‘선박충돌’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삼성중공업이 주 가해자로 부각되는 점을 희석시키며 사실관계를 짐짓 호도했다.

대책위원회의 구성에 관한 규정도 문제다. 애초 발의된 특별법안이나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내용은 대책위 위원의 절반을 피해자 단체가 추천하거나 전문성 있는 민간인으로 구성하도록 했으나, 이 법안 제5조3항에서는 ‘중앙 행정기관의 장 또는 관계기관·단체의 장’만을 위원에 임명 또는 위촉할 수 있도록 폐쇄적으로 한정시켜 불순한 로비를 하기 쉽도록 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피해주민에 대한 선급금 지급을 규정한 조항은 언어도단이다. 제8조 1항에서는 피해자가 ‘국제기금’ 등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 게 너무 오랜 시일이 걸리는 실정에 비추어 당국(국가·지방자치단체)이 피해자에게 미리 일정 범위의 금액을 지급할 수 있는 선급금 제도를 신설하자고 하면서, 제8조 2항에서는 ‘국제기금’에서 사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선급금을 결정하겠다니 결국 선급금은 선급금이 아닌 게 돼 그 자체가 모순에 빠진다. 언어 유희로써 국가가 피해주민을 속이고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다. 제9조 2항에서도 선급금의 지급은 ‘국제기금’에서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어 또 모순이 발생한다. 선급금 지급은 국제기금 한도액과 무관한 것으로 굳이 국제기금의 사정을 운운할 이유는 없다.

손해배상 사정도 국제기금이 우리의 주권을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 우리 영토 안에서 우리 국민이 갖는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해서는 당연히 우리 법에 따라 우리 법원이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외국 법인인 ‘국제기금’이 손해액 산정 전문자격이 없는 해사검정업체에 사정을 의뢰하는 것은 무효로밖에 볼 수 없다. 우리 정부가 그런 사정을 근거로 피해 주민을 상대하는 행정을 펴겠다는 발상은 주권 포기요, 국민보호의 통치권을 방기하는 조처다.

253명의 의원이 발의한 각 당의 특별법안과 공청회에서 그토록 강조됐던 ‘원인제공자의 배상책임 원칙’이 왜,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폐기됐는지 납득할 수 없다. 이 무슨 특별법인가? 정부와 가해자에 대한 면죄부에 다름 아니다.


장기욱/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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