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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하면 된다’는 강경론 / 김지석

등록 2008-04-17 20:55

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 논설위원
아침햇발
대학생 때인 1970년대 후반 학교 부근 작은 음식점의 벽에 ‘하면 된다’라고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하’의 동그라미 부분이 끊어져 ‘라’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 집은 ‘라면 되는 집’으로 통했다. ‘하면 된다’라는 구호에 대한 학생들의 반감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하면 된다’는 노동력 투입이 경제 발전의 핵심이던 시절 인력 동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호다. 이 구호엔 두 측면이 있다. 첫째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욕의 고취다. 경제가 단순할수록 사람의 의지가 중요하기 마련이어서, 이런 면에선 나름대로 효과를 봤다. 둘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결과를 만들어내라는 압박이다. 이런 압박이 통하려면, 목표를 설정하고 결과를 강요하는 윗사람과 무슨 수를 쓰든 이뤄내야 하는 아랫사람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위계 질서가 필수다. 이런 구조에선 목표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중간 과정의 부작용들도 쉽게 은폐된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당시와 비슷한 ‘하면 된다’는 생각에 기초해 주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공무원들을 쥐잡듯 한 것도 이를 위해 확실한 위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교육 분야를 보자. 정부 교육 정책의 핵심은 전국 학생을 성적순으로 줄세우는 것이다. 일제고사 부활과 우월반 편성, 특목고 대거 신설 등 이른바 자유화는 성적 경쟁을 위한 수단이다. 학생과 학부모, 교육당국, 학교, 교사 등 교육 주체는 모든 방법을 동원할 ‘자유’를 갖는다. 얼마 안 가 교육당국과 학교는 성적을 평가하고 결과를 요구하는 역할을 맡고, 모든 방법은 학생과 학부모가 찾아야 하는 구조가 정착될 것이다. 무엇을 위한 점수 경쟁인지는 누구도 묻지 않는다.

경제 분야도 비슷하다. 이 대통령은 대선 때 7% 성장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후 목표치는 낮아졌지만 ‘하면 된다’는 태도는 그대로다. 정부는 기업을 위한 큰 폭의 규제완화와 감세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물가 상승을 감수하고라도 돈을 풀겠다고 한다. 합법적 집회·시위에도 엄정 대처하겠다는 정부 방침은 노동자와 국민을 위계 질서 아래쪽의 통제·동원 대상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하면 된다’의 결정판은 대북·대미 정책이다. 정부의 핵심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은 언젠가 도달해야 할 결과만을 제시한다. 북한은 이를 이루기 위해 따라와야 할 하위 파트너이고 미국은 확실한 상위 파트너다. 미국-한국-북한으로 이어지는 위계 질서를 설정한 뒤, 북한이 이 틀을 받아들이고 노력하면 돕겠다는 것이다. 균형적 한-미 동맹을 추구한 이전 정권의 노력은 이 구도에 어긋나므로 부정된다. 10·4 남북 정상선언 등 기존 약속의 이행도 마찬가지다. 최근 남북 관계가 나빠진 것은 북한이 이 틀을 거부하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 또한 온갖 요구를 한꺼번에 풀어놓아 정부를 당혹하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강경하다. 목표의 타당성은 두고라도 방식이 지금 상황에 전혀 맞지 않다. 인력 질이 중요한 경제·사회 구조에선 자신감과 의욕만으로 무엇을 이뤄낼 수는 없다. 곧 ‘하면 된다’의 첫째 측면은 무력하다. 둘째 측면은 좋게 말하면 ‘결과 중시’인데, 이를 위해 상명하복 식의 밀어붙이기에 기대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정부가 빨리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더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김지석 논설위원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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