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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철든’ 농업을 위하여 / 권복기

등록 2008-05-06 19:55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한겨레 프리즘
종교인은 아니었지만 외할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가끔 말세론을 펴셨다. 제철 음식이 사라지면 사람들이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때가 바로 말세라는 말씀이셨다. 평생 텃밭에서 키운 채소와 산나물 들을 주로 드신 당신은 ‘철 없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아흔이 넘도록 건강하게 사셨다.

외할아버지에게 ‘제철 음식’은 절기에 따라 생산되는 농산물만이 아니었다. ‘제철’에는 공간적 개념도 포함됐다. 신토불이라는 말은 모르셨지만 예로부터 백리 밖에서 난 음식은 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당연히 수입 농산물은 아예 먹지 못할 음식으로 여기셨다. 오랜 기간 배에 실려오는 농산물이 상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며 틀림없이 ‘고약한 약’을 뿌렸으리라 믿으셨다.

요즈음 세태를 보면서 외할아버지가 예견하신 ‘말세’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든다. 채소나 과일에서 철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다. 봄에 나는 딸기는 계절보다 먼저 시장에 도착해 우리를 맞는다. 여름은 고사하고 봄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여름 과일인 수박과 참외를 맛볼 수 있다. 한겨울에도 오이·상추·풋고추와 같은 야채를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열대 지방 과일인 바나나와 오렌지는 사시사철 먹을 수가 있다.

가공식품이야말로 ‘철 없는’ 먹을거리의 대표 상품이다. 거의 모든 종류의 먹을거리가 오래 보관이 가능하도록 가공·포장되어 있다. 돈만 있으면 온갖 종류의 먹을거리를 언제든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시대다. 그렇게 먹을거리가 넘쳐남에도 질병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땅에서 기른 제철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자주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이제 그런 ‘철 없는’ 먹을거리 문화에는 곧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먼저 농민들이 ‘철 없는 농업’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다. 겨울 비닐하우스 농사에는 난방이 필요하다. 석유값 폭등으로 농민들에게 싼값으로 공급되던 면세유값도 크게 올라 조만간 농민들은 생산비와 운송비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소비자들도 변하고 있다. 건강과 먹을거리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철 없는’ 농산물이나 가공식품 대신 제철 음식을 찾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또 환경운동 단체와 농민 단체들은 특정 지역에서 기른 농산물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로컬푸드 운동을 시작했다. 운송에 드는 석유 소비를 줄이고, 농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 정부는 한때 화학비료와 농약을 강권했고, ‘난방 농업’을 권장해 왔다. 전문가들도 그런 정책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이제는 ‘석유 농법’ 대신 지속 가능한 ‘제철 농법’을 더욱 확산시켜야 한다.

지금도 현명한 이들은 제철 채소나 과일을 먹는다. 값이 싸다. 맛도 좋다. 노지에서 키운 딸기와 이른 봄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딸기 맛은 차이가 크다.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과일은 향부터가 다르다. 당연히 몸에 좋을 터이다.


정부의 농업 정책에 ‘철이 들기를’ 바란다. 외국산 쇠고기 수입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신토불이 먹을거리나 제철 음식과 건강의 관계를 연구했으면 한다. 국민 건강과 농업을 함께 지킬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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