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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민주주의와 다양성 / 박재승

등록 2008-05-07 19:51

박재승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박재승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시론
취임 2개월이 된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중앙부처 산하 단체장들과 공기업, 금융기관장의 사표를 받아내더니, 이제는 경제·인문사회 연구회 산하 국책연구기관장들에 이어 과학기술 분야 연구기관장들에게도 사표를 요구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연구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 중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처사는 단순히 연구기관의 독립성 등을 훼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민주주의의 진수는 어느 쪽이 정권을 잡는 것과는 상관없이 권력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교체하는 데 있다. 불행히도 우리의 정치 풍토는 아직 이런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정치문화는 정권을 잡으면 지배를 하지만 잡지 못한 집단은 죽거나(김구), 추방을 당하거나(김대중), 정무직이 아니라도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 숨죽이고 살아야 한다. 권력을 잃은 쪽이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는 권력을 잡은 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민주주의는 다수자, 강자의 지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소수자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그들에게 다수자가 누리는 기회와 권리를 동일하게 부여하는 데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수자가 보호되는 것이 하나의 문화, 이른바 다양성의 문화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다양성의 가치를 논할 때 언급되는 인도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 아크바르는 16세기에 인도를 정복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무슬림이면서도 힌두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포용하였다. 다른 종교를 단순히 용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와 다른 사상을 모두 존중하였다. 이것이 아크바르가 인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을 이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이 다양성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문화에서는 아직까지 다양성의 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의 경우 남북전쟁, 프랑스혁명 등의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이 다양성 문화를 일구어냈다.


우리는 어떤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48년 제주 4·3 사건, 1960년 4·19 혁명, 1972년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항거, 1980년 5·18 민주항쟁, 1987년 6월항쟁 등 수많은 ‘사상의 내전’으로 갖은 희생과 시련을 겪을 만큼 겪었다. 민주주의의 학습을 할 만큼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그동안의 대가가 너무 아깝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이기는 쪽은 다수가 되고 지는 쪽은 소수가 된다. 다수자는 이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위에 있는 것이다. 소수자를 배제하지 말고 껴안고 가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런데 정부·여당 주요 인사들이 이른바 과거정권 인사 사퇴를 요구한다. 그들은 국민을 섬기는 정치를 하겠다고, 통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한 분들이다.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한 분들이다. 어렵게 싹터 나오려는 다양성 문화를 해치지는 말았으면 한다. 돈만 많다고 반드시 선진국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박재승 변호사·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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