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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운하반대순례단] 만물의 ‘영장’ 아니라 ‘철천지원수’ / 이원규

등록 2008-05-23 19:07

이원규/시인·‘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총괄팀장
이원규/시인·‘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총괄팀장
운하반대순례단
유장한 강물의 속도로 103일을 걷고 또 걸어 다시 한강을 찾아왔습니다. 영하 15도의 칼바람 속에 천막을 치고 새우잠을 자며, 영상 35도의 때 아닌 무더위에 파김치가 되어 걷다 보니 머리가 텅 비도록 단순해졌습니다. 강물이 맑으면 순례단의 몸과 마음도 맑아지고, 강물이 부글부글 거품을 내뿜으며 죽어가면 순례단의 ‘뫔’도 밤새 천막 속에서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해진 것인지, 좀더 명쾌해진 것인지 이전보다 세상살이가 훨씬 잘 보입니다. 몸이 분명해진 것이겠지요. 육체가 분명하면 정신의 거처도 분명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복잡하게 살았습니다.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을 개발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서부터 꼬이고 꼬이는 삶을 자처하게 됐습니다. 마침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다 못해 버림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자연 보호’니 ‘환경 보호’니 하는 말조차 인간의 탈을 쓴 이들이 지어낸 교만의 극치요, 자연의 보복이 두렵거나 생존의 위기를 일시적으로 모면하려는 술책일 뿐이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던 인간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만물의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또한 이현주 목사의 ‘후레자식론’처럼 참회가 부족해도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죽어 가는 강물 앞에서 일시적인 참회는 말 그대로 참회도 아니었습니다. 경제성장의 희생양으로 삼은 한반도의 강들이 되살아나기 전까지는 절대 멈출 수 없는 참회의 머나먼 길임이 더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서울로 흐르는 한강은 비교적 수질이 좋아졌지만 영산강·금강·낙동강은 하구둑에 항문이 막힌 채 독성의 변비를 앓고 있었습니다. 만화방창 강변 풍경은 사진 속에서만 아름다울 뿐, 악취와 주검의 강물은 실로 처참했습니다. 4∼5급수로 죽어 가면서 식수는 고사하고 농·공업 용수로도 쓰지 못할 지경이니, 마침내 강이 인간에게 보복을 시작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봄빛 완연한 강변에 순례단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는 강변에 농부와 어부와 물고기가 없고, 새들도 날아들지 않았습니다. 순례단 또한 강물에 세수는 고사하고 차마 썩을 것만 같아 발을 담글 수조차 없었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강물로 농사를 짓지 않고 해마다 더 깊이 관정을 박는 바람에 지하수의 수위는 낮아지고, 하류의 풍부한 강물을 포기하는 대신 상류에 식수와 농수용 댐을 지어야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머지않아 물부족 국가가 된다는 말이나, 운하 건설을 통해 강도 살리고 경제도 살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최근 환경부가 ‘도랑 살리기’를 한다니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이마저 먼저 운하 백지화를 선언하지 않는 한 대국민 사기에 불과합니다. 이는 최근 운하(canal)를 물길(water way), 혹은 뱃길 복원이라 바꿔 부르겠다는 기만 술책과 다를 바 없고,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다 사상 초유의 ‘광우병 민란’이란 대역풍을 부른 잘못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더는 기존의 ‘운하 망령’에 탈을 덧씌우는 사기를 치기 이전에 ‘운하 백지화’부터 선언하고, ‘또하나의 38선’ 같은 하구둑을 허물어 강과 바다와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온 국민들에게 묻고 또 물어 참구할 때가 왔습니다.

행여 새 정부가 끝까지 ‘어머니 강의 철천지원수’를 고집한다면 우리 순례단은 이제 목숨을 바칠 일만 남았습니다. 순례자가 아니라 순교자가 될 각오가 다 되었습니다.

이원규/시인·‘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총괄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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