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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인도적 지원은 무기가 아니다 / 신영전

등록 2008-05-27 20:44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기고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잔인한 범죄에 온 국민이 치를 떨었던 것이 얼마 전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횡포로 가녀린 숨을 몰아쉬다 죽어가는 어린이는 혜진이, 예슬이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아주 지척의 거리에 수십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콩찌꺼기, 심지어 흙으로 주린 배를 채우다 못해 가쁜 숨을 내쉬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최근 북한의 주민들을 돕고 있는 단체들은 춘궁기에 접어들면서 식량난을 겪는 북한 소식들을 연이어 전하고 있다. 식량값이 무섭게 폭등하고 있고, 평양과 함흥, 청진 등 주요 도시에서 4월부터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한다.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에서도 아사자가 나타나고 있다 하니 다른 지역 주민들의 고통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세계식량계획 등 국제기구와 민간지원단체들은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량이 100만t에서 166만t 정도에 이르고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600여만명이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지난 2년간의 홍수와 비료 부족, 여기에 북핵 문제로 국외 식량지원이 준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중국마저도 애그플레이션(농산물가 상승에 따른 물가 상승)과 식량 부족으로 북한과의 교역량을 줄이고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1990년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 일렀던 대기근 이상의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굶주림으로 죽어간 사람 수는 200만명에 이르렀고, 그들 중 대부분이 어린이, 노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이명박 정부는 대북 식량 지원 의사를 표명하고 있으나 상황의 절박함에 비해 그 진행이 너무 더디다.

<북한의 기아>라는 책을 쓴 나초스는, 1990년대 북한을 덮친 기아는 사전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일차적 책임은 북한에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잘 알았고 또한 지원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이 있었으면서도 모른 체하거나 지원을 늦춘 한국과 주변 강대국들에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북한과의 정치 회담이나 경제 협력을 중단할 수 있다. 그것은 온전히 정치의 문제이고 경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주의적 지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도주의는 내 말을 잘 들을 때만, 내게 이득이 될 때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인도주의가 실용주의를 만나면 그것은 더이상 인도주의가 아니다. 기존 대북지원은 일반 지원과 인도적 지원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진행해 온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에 그 둘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하고,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이나 주장에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 인도주의는 ‘그럴 때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누는 것이다. 또한 남쪽 어린이의 잔혹한 죽음에 치를 떨듯 수십만명 북쪽 어린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않게 함께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이 원칙을 잊어버릴 때, 인도주의는 쉽게 무기가 된다. 더욱이 인도주의적 지원은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은 <아담,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란 소설로 시대를 고발했다.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90년 대기근 같은 비극이 재현되어 또 한번 수십만 아니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다면, 먼 훗날 사람들이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물을 때 과연 우리는 뭐라고 답할 것인가? 북녘의 아이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급하다. 인도주의적 지원을 머뭇거리지 말라. “인도적 지원은 무기가 아니다.”


신영전 한양대 교수·사회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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