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아침햇발
‘조·중·동’으로 불리는 조선·중앙·동아일보는 우리 사회의 최대 권력이다. 언론시장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그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류를 자처하며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이 사회를 사실상 장악해 왔다.
철옹성같이 영원할 것 같던 조·중·동의 이런 절대 권력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쇠망치에 두들겨맞고 전동 드릴로 구멍이 뚫려서가 아니다. 훅 불면 한숨에 꺼질 것 같이 여리고 가냘픈 촛불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으로 촉발된 촛불이 이들 쪽으로 번졌다. 처음엔 조·중·동 거부 구호를 외치던 수준이었는데, 이젠 시민들이 ‘광고 중단 압박’에 나서면서 이들은 실제로 큰 타격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광고 압박’ 정도로 문 닫을 만큼 취약한 이들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조·중·동이 지금까지 보여 온 보도행태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이 누려온 권력은 모래성처럼 스멀스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그런 조짐은 이미 시작됐다. 왜 시민들은 조·중·동에 이렇게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취재 현장에서 만나는 조·중·동 기자들은 대부분 아주 유능하다. 매우 부지런하고 기자로서의 성실성도 본받을 만하다. 그런데 특정 사안에 부닥치면 이상하게도 이런 기자근성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왜곡된다. 특정 사안이란 소속된 언론사의 이익과 그들의 권력 기반인 특정 정권이나 극우 보수 집단에 관한 것들이다. 언론의 공적 기능이 실종되는 것이다.
공적 기능이 실종된 언론은 언론으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잃는다. 언론사가 곤경에 빠지더라도 공적 역할이 요구될 때는 이를 숙명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게 언론이다. <한겨레>가 삼성의 광고 중단으로 수십억원의 손해가 예상되는데도 ‘삼성 비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것은 언론의 공적 기능 때문이었다.
조·중·동은 그동안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한 적이 많았다. 반민주 정권의 편에 서고,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남북 사이 평화 공존보다는 대결을 부추겼다. 사주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언론기업’으로서의 한계로 보이는데, 이제라도 언론의 공적 기능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이 각자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언론의 자유이자 권리다. 하지만, 그것도 언론의 공공성을 바탕으로 사실에 근거한 일관된 보도를 한다는 최소한의 전제를 충족한 다음의 일이다. 언론자유를 방패 삼아, 사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사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려 해선 안 된다.
이번에 시민들이 세 신문에 격분한 이유는 쇠고기 협상 보도가 이런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터이다. 조·중·동의 폐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온 시민들이 쇠고기 보도를 계기로 이들의 실체를 더욱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도 자성은커녕 ‘광고 압박’에 나서는 누리꾼들을 업무방해죄 등으로 형사처벌될 수 있다고 협박하는 것 등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대응이다. 좌파 신문이 이를 부추긴다는 식의 인식으로는 결코 문제를 풀 수 없다.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조·중·동이 언론의 공적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시장경제 발전이 수십년은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조·중·동은 그 반대 길을 걸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촛불의 배후를 거론하고, 색깔론에 기대고, 공권력을 끌어들여 촛불을 억압하려 하고 있다. 그럴수록 ‘절대 권력’을 녹이려는 촛불의 힘은 점점 커져갈 뿐이다. 조·중·동만 못 읽는 이 시대의 흐름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조·중·동이 언론의 공적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시장경제 발전이 수십년은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조·중·동은 그 반대 길을 걸어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촛불의 배후를 거론하고, 색깔론에 기대고, 공권력을 끌어들여 촛불을 억압하려 하고 있다. 그럴수록 ‘절대 권력’을 녹이려는 촛불의 힘은 점점 커져갈 뿐이다. 조·중·동만 못 읽는 이 시대의 흐름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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