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이명박 정부는 국민 60% 이상이 요구하는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에 나설 의사도 없고 의지도 없다. 입으로 걸핏하면 말하듯이 국민을 진정으로 섬긴다면 국민 다수가 바라는 건강권과 검역주권 확보를 위해 재협상이 아니라 재재협상에라도 나서야 한다. 그게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국민보다 더 섬겨야 하고 더 두려운 대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건강권을 저당잡히는 일쯤 마다하지 않는 정치세력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두 번에 걸쳐 국민에게 사과하는 척하더니 촛불이 수그러든다고 판단한 탓일까, ‘정보전염병’ 때문에 대의정치가 위협받는다며 국민을 꾸짖는다.
요컨대, 대의 선거제도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선택했으니 승복하라는 얘기다. 적어도 다음 선거 때까지는. 그리하여 오늘 한국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지지율 20%대의 대통령이 국민 60%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무기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조중동’이 법·질서와 함께 대의민주주의를 합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의 대의민주주의에 ‘대의’만 남았고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다시금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듯이.
민주주의가 결핍되거나 국민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지배 헤게모니가 관철되지 않을 때, 집권세력은 그 빈자리를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채우려 한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현대사를 통해 지겹도록 경험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찰·경찰·국가정보원·국세청이 옛날의 못된 행태와 습관을 아직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청장은 촛불 시민들을 마치 적을 상대로 하는 작전 펼치듯 진두지휘하며 탄압했다. 경찰청 소속 인권위원들이 경찰의 과잉 진압과 그에 따른 인권 탄압에 항의하여 전원 사퇴했지만 어청수 경찰청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엠비시>(MBC) 피디수첩을 수사한다고 검사 다섯 명이 동원되었다. 그들의 귀에는 세상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호기롭게 토론에 참여했던 검사들은 어디로 떠났나? 이미 떡값과 알량한 권력욕으로 악화가 양화를 모두 밀어낸 탓인가. 기개는커녕 영혼조차 찾기 어렵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다. <와이티엔>(YTN) 사장을 낙하산으로 자기 사람을 심는 일 정도는 차라리 약과에 속한다. 국가 기간방송인 <케이비에스>(KBS)의 사장을 바꾸려고 전방위적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새 집권 세력이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 우리에게 뜻하는 바다. “법과 질서가 바로 서지 않으면 신뢰의 싹은 자랄 수 없다”고 했던가. 그러나 법과 질서는 최소한의 상식이며 양심이다. 10년 뒤에 ‘대의’로 포장되어 찾아온 것은 민주주의의 성숙이나 선진화가 아닌 국민의 뜻을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무시하는 뻔뻔함이다.
공자께선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과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사람다움의 기본 요건으로 보았다. 하물며 뻔뻔한 자들이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선거권을 획득하려고 싸운 역사적 경험이 없다. 선거권의 중요성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 필요하다. 뻔뻔한 자들은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광신자들 이상으로 질기다. 질긴 놈이 이긴다고 했다. 사익추구 집단이나 광신자들보다 더 집요하지 않을 때 ‘민주’가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의’에 의한 민주주의의 억압이나 퇴행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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