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기고
지난해 5월부터 두 달 동안 조사한 개성의 고려 왕궁 시굴조사 보고서가 발간됐다. 흔히 만월대로 불리는 고려시대의 정궁(正宮)은 공민왕 시기인 1362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불탔다. 중앙부인 회경전 터는 북한이 발굴 조사했지만, 동서편의 유적지는 후대의 손길만을 기다린 채 600여년을 잠들어 있었다.
남북이 고려 궁궐 공동조사에 합의한 것은 2006년 6월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시굴조사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다시 협의를 거쳐 지난해 조사를 시작했다. 현장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고 태어난 보고서를 마주하니, 발굴단원 못지않은 감회가 어린다. 남과 북의 인내와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공통의 애정이 이러한 성과를 낳은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며, 발굴단원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정말 유적이 남아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회경전 서편 1만평에서는 정연하게 쌓은 축대와 수로, 바닥에 깐 전돌, 그리고 24동 이상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특히 ‘아’(亞)자 모양의 건물지와 5개의 예단을 갖춘 건물지가 주목을 받았는데, 전자는 이 구역의 중심이 되는 장엄한 건물이고 후자는 조상을 모시던 경령전(景靈殿)으로 추정된다. 궁궐 안에 경령전을 두고 조상의 진영(眞影)을 모셨다는 문헌 기록이 이로써 확인된 셈이다. 다양한 유물도 출토됐다. 그 가운데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높이가 무려 65㎝나 되는 원통형 청자다. 가마터와 제작자를 기록한 기와들이 114점이나 출토됐고, 연화문·귀목문·범자문·용문 계열의 화려한 막새기와들과 용을 비롯한 여러 모양의 잡상(雜像)도 출토됐다.
이번 조사에서 서편 구역의 건물 배치 양상을 파악하게 되고, 이를 통해 고려 궁궐의 구조를 복원하게 됐다. 상부는 모두 소실됐지만 600년 넘게 흙 속에 묻혀 있던 주춧돌과 석축, 뛰어난 청자와 명문 기와, 다양한 잡상은 당시 궁궐의 장엄한 모습과 왕실의 화려했던 생활을 보여준다.
이번 조사는 한정된 문헌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고려시대 연구에서 고고자료의 활용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무엇보다 남북 학자들이 공동으로 진행했다는 데서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남북 학자들은 발굴 방법과 유적·유물의 해석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고 공동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남북 학술교류의 바람직한 사례를 만들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싸고 진행된 교류는 통일 이후 분단 민족사를 온전히 서술하는 일의 작은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 궁궐 조사는 아쉽게도 계속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건물이 밀집된 곳을 발굴하는 데까지 교류가 진전됐지만, 우리 사정으로 합의를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고려 궁궐 조사는 한두 해 사이에 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쉬지 않고 해도 5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따라서 천천히 그러나 중단하지 말고 조사해야 한다. 유적 조사 같은 학술 교류는 정치적 여건을 떠나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류를 통한 민족사의 회복이라는 원론을 다시 꺼내야 하는 상황이 가슴 아프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이 또한 넘어야 할 산일 뿐이다. 산은 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에도 있고, 그 높이도 생각보다 높다. 그러나 산이 높다고 하여 물이 흐르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흐르는 물처럼 남북의 학술 교류가 그렇게 진전되기를, 그리하여 다시 고려 궁궐 만월대에서 남북 학자들이 조상의 영혼을 찾아 함께 땅을 긁을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한다.
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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