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건망증에 빠진 한국경제 / 박순빈

등록 2008-08-24 21:45수정 2008-08-24 21:54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
편집국에서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부 정책 중에는 큰 아픔을 겪은 뒤 나온 것이 많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인생사뿐 아니라 경제에서도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외부 충격이나 시장의 실패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전화위복의 동력으로 잘 활용합니다. 반대로 시행착오만을 끝없이 되풀이해서는 선진국이 되기 어렵습니다.

정부가 지난 21일 ‘주택공급 기반 강화 및 건설경기 보완 방안’을 내놓았습니다. 수도권 아파트 분양권의 전매(되팔기) 제한을 대폭 완화한다는 게 뼈대입니다. 재건축 아파트 입주권(조합원 지위)에 대해선, 이날부터 곧바로 전매제한 조처를 풀었습니다. 이에 따라 실제 집에 살지도 않을 작정이면서 아파트 분양을 받아 웃돈을 얹어 되파는, 이른바 ‘딱지 거래’가 다시 기승을 부릴 수 있게 됐습니다.

전매 행위는 주택 투기의 전형입니다. 국토해양부는 ‘수도권에서 아파트 분양에서 당첨된 뒤 직장을 지방으로 옮긴 경우 등’의 사례를 내세우며 전매제한 완화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투기적 가수요를 끌어들이려는 조처임이 분명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전매제한의 강화는 지금 여당 쪽의 작품입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문민정부 집권 2년차인 1994년에 아파트 투기를 막겠다며, 당시 주택공사가 짓는 아파트에만 적용하던 전매제한을 공공·민간택지 아파트에까지 확대한 것입니다. 이를 국민의 정부가 외환위기 직후 건설경기를 살리려고 풀었고, 참여정부가 2003년 ‘8.31 부동산대책’의 하나로 다시 살려낸 게 전매제한 제도의 역사입니다. 문민정부나 참여정부 모두, 투기적 가수요에 따른 아파트 가격의 폭등이라는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미분양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처방전 역시 우려를 자아냅니다. 정부는 주택건설 업체들의 자금난을 덜어준다며 주공과 주택보증의 여유자금 2조원을 들여 전국에 널려 있는 미분양 아파트들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미분양이 대량 발생하는 경로는 간단합니다. 너무 많은 건설사들이, 그것도 수요자들의 구매 능력에 견줘 지나치게 높은 가격으로 집을 분양하기 때문입니다. 공급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전형적인 시장 실패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공공부문에서 떠안게 되면, 분양값도 내려가지 않고 건설업체들의 부실은 더욱 깊어집니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6~97년의 경험이 이를 잘 증명합니다. 당시에도 정부가 국민주택기금 등을 동원해 미분양 해소에 나섰지만, 결국은 주택건설사들의 무더기 도산과 이에 따른 금융 부실의 확산을 막지 못했습니다.

경제 관료들을 사석에서 만나보면, 이런 경험칙을 모르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왜 부작용과 후유증이 충분히 예상되는 정책이 나오는 것일까요? ‘성장의 유혹’ 말고는 달리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단기에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는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발생할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는 성장 위주 정책은 나중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건설경기로 성장을 이끄는 정책은 미래의 성장 과실을 앞당겨 따먹는 ‘외상 성장’이며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대부분 경제학자들도 동의하는 지적입니다.


박순빈 경제부문 편집장sbpark@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