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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동전의 양면과 경계의 모호함 / 강태호

등록 2008-09-04 20:38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
한겨레프리즘
북한은 8월14일부터 연료봉 인출·봉인의 불능화 작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러나 로버트 우드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은 19일 “공은 북한 쪽에 넘어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 검증체계를 먼저 마련해야 테러 지원국 해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8월26일 북 외무성 성명은 불능화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또 ‘불능화의 원상복구 조처 검토’를 경고했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이 성명을 이렇게 비유했다. “북한은 그 공을 코트 밖으로 쳐 버렸다.”

경기는 중단됐다. 북은 원상복구의 행동에 나서고 있다. 한국의 6자 회담 수석대표인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중국의 건설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트 밖으로 나간 공을 가져와 경기를 진행시키는 일을 중국이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러자면 핵심 당사자인 북-미 양쪽이 합의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하다. 지난해의 10·3 합의로는 경기를 계속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불능화 2단계를 담은 10·3 합의는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양쪽이 해야 할 조처들을 담고 있지만 빈구석이 있다. 불능화 작업과 그에 상응한 에너지 지원은 명료하다.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지키고 확인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신고와 테러 지원국 해제는 모호하다. 10·3 합의엔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라고만 돼 있다. 신고에 ‘검증 의정서’가 포함돼야 한다는 언급이 없다. 북 외무성 성명은 “6자나 조-미 사이의 그 어떤 합의들에도 우리의 핵 신고서에 대한 검증문제를 (테러 지원국) 명단 삭제의 조건부로 규제한 조항은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합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러 지원국 해제는 어떤가? 10·3 합의는 이 부분도 모호하다. 거기엔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 위한 절차를 개시하고’라고만 돼 있다. 미국도 우린 절차는 개시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신고서와 검증은 동전의 양면이며, 미국 사람들 표현으로는 젓가락의 두 짝”이라고 말했다. “신고서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검증 합의 없으면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할 말이 있다. 신고서가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면 테러 지원국 해제 또한 발효되도 그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다. 북쪽 표현을 빌려 얘기하면 미국은 테러국이라는 모자를 씌워놓고 각종 제재를 가해 왔다. 명단 삭제의 ‘해제’는 그 모자만 벗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젓가락의 한 짝일 뿐이다. 미국이 핵신고를 확인할 검증 의정서를 요구한다면, 북한도 테러 지원국 해제를 현실에서 ‘검증’할 수 있는 ‘의정서’를 내놓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신고서 제출 뒤 국제통화기금(IMF)과 아시아개발은행(ADB) 가입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풀도록 요구했다는 보도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명단 삭제만으로 신고와 검증의정서에 동의하란다면 북한 보고는 젓가락 한 짝으로 밥 먹으라는 얘기 아닌가?

더 근본적으로 보면 논란은 비핵화 2단계 합의인 불능화가 안고 있는 모호성에서 오는 것이다. 불능화는 폐쇄에서 폐기 단계로 가는 잠정적인 조처들이다. 말로는 2단계로 구분되지만, 실제는 돌이킬 수 있는 폐쇄와 돌이킬 수 없는 폐기의 중간 어디쯤이다. 검증 의정서에 합의하라는 것은 그 모호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10·3 합의엔 그 답이 없다. 길을 열어갈 새로운 이정표가 필요하다.

강태호 남북관계 전문기자kankan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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