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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13 15:21 수정 : 2005.01.13 15:21

박정희 전댜통령의 아들 박지만씨. (한겨레21)

‘아버지 명예’ 박정희와 빌리브란트 아들의 태도
([원제]’박지만과 마티아스 브란트’)

신문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는 기사를 접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맘에 안드는 말을 하고 다닐 때 나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차이가 있다면 나의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였는데 반해 그의 아버지는 사회적,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라고 할까.

그 역사적인 공과나 영화의 사실왜곡 여부, 법적 해석들은 전문가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다른 아버지의 한 아들을 상기시키고 싶다. 독일의 연극배우인 마티아스 브란트는 2003년 그의 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나올 때 그 아버지에게 피해를 입혔던 한 동독간첩의 역할을 자진해서 맡는다. 그의 아버지 빌리 브란트는 베를린시장(1957~66)과 외상(1966~69)을 거쳐 전후 사민당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서부독일의 총리(1969-74)를 지낸 사람이다.

60년대에 “평화가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평화없이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자” 등의 말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많은 반대를 무릅쓰며 냉전시 서구의 정치가로는 처음으로 동구권과의 외교를 선도하여 해빙정책을 단행한 사람이다. 그는 또한 소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던 윤이상, 정규명씨 등을 한국에서 다시 서독으로 데려오는데 큰 힘을 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외상이었다.

%%990002%% 그는 1970년에 전후의 독일총리로는 처음으로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게토 나치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어 역사에 대한 독일인의 사죄를 표하고 전쟁보상 정책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듬해에 노벨평화상으로 그의 이런 정책들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되고, 그의 정치가 이후의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독일통일의 초석을 다졌다는 데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나 원할 만한 그런 모범적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면에 그는 늘 여자들과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중은 감쌀 수 있었지만 개인과의 관계에는 무능한 사람”이었다고 그의 당시 부인은 회상한다. 결국 그는 그를 늘 수행하는 비서가 동독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독일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기욤사건’에 책임을 지고 수상직을 물러난다. 귄터 기욤은 동독에 충성을 하며 동시에 브란트 총리를 흠모했던, 그러나 그 갈등조차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살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인물인 간첩 기욤의 역을 영화 ‘권력의 그늘에서’에서 브란트 총리의 막내아들 마티아스는 역시 별스럽지 않게 해낸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임종 직전의 긴 대화가 거의 전부였다고 회상하며, 그러나 그 내용만큼은 아무한테도 안 알리는 자신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비 오는 어느 저녁,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들여보낼 여자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동행하는 역할을 묵묵히 해낸 것이다. 또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영화에서 어쩌면 부정적으로 묘사된 다른 인물들의 불평이 언론에 뜨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총리직 사퇴 여부를 둘러싸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차근히 설명해 주는 엄마에게 영화 속의 어린애가 묻는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멍청이군요?” 그런 말을 정말로 했었느냐는 질문에 배우 마티아스는 “할 수도 있었지 않는가”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기억 안 난다고. “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는 “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아버지의 측근이었던 에곤 바아씨는 “마티아스가 그 역할로써, 기욤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와의 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마티아스 브란트가 내면에 갖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거리에는 어쩌면 유럽인들의 정서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곧 그의 역사에 대한 자세로 과장해석할 필요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얘기(story)되어질 때, 역사가 (history) 서술될 때, 얘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사물을 보는 자세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붉힌 얼굴과 몸싸움을 거쳐야(도) 당면의 국정사안들이 통과되(지 않)고, 현대사의 재해석, 재재해석의 논란이 경박한 양극적 이념논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잠시 비껴서 보는 자세를 배우는 것도 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정윤선/전 막스 플랑크 연구소 연구원·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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