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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음복과 나눔 / 권복기

등록 2008-09-09 19:49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한겨레프리즘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음복(飮福)을 중히 여기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음복은 제사 뒤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20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는 생전에 늘 음복을 챙기셨다. 할머니에게 음복의 대상은 제사에 참석한 가족이나 친지들만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제사를 지낸 뒤 상 주위에 둘러앉아 음복을 할 때 할머니는 접시에 부지런히 음식을 담으셨다. 명절 아침이나 제사를 지낸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제사 음식이 골고루 담긴 쟁반을 들고 이웃집을 찾아갔다.

대문을 두드렸을 때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는 이웃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웃들은 들고간 접시를 비운 뒤 다른 음식을 담아줬다. 명절이면 자신들이 장만한 차례 음식을, 제삿날 찾아갔을 때는 밤·감·사과 등 과실이나 아니면 고구마·감자 몇 알이라도 얹어 줬다.

어릴 때는 음복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특히 갖고 간 음식과 비슷한 음식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명절 때면 더욱 그랬다. 음복에 나눔의 정신이 담겼음을 안 것은 어른이 되고서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지금은 두루 풍족하게 살기에 음식이 귀하지는 않다. 하지만, 1960년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먼 옛날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는 제삿날이나 되어야 고기나 과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음복은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때 귀한 음식을 서로 나누는 행위였다. 사람들은 제삿날이면 큰맘 먹고 장만한 고기와 과일을 음복을 통해 서로 나눴다. 명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은 차례상도 보잘것이 없었다. 음복은 그런 이웃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나눔을 가능하게 한 풍습이었다.

음복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만드는 데도 나눔의 정신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실이 특히 그랬다. 과실은 모두 껍질을 까서 제사상에 올린다. 조상님들의 혼백이 드실 수 있도록 깎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음복이 나눔임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깎은 과실은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 배는 조금 다르지만 사과·감·밤·대추 등 대부분의 과실이 ‘맛이 간다’. 견물생심이라고, 맛난 음식은 두고두고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조상들은 그런 생각이 아예 들지 않도록 과실의 껍질을 벗기도록 하지 않았을까. 탕도 마찬가지다. 국으로 끓임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고기맛을 볼 수 있도록 한 게 아닐까. 그저 짐작일 따름이다.


할머니는 명절이나 제삿날 이외에도 나눔을 가르치셨다. 할머니는 귀한 음식이 생기면 꼭 세 번씩 덜어주시면서 남에게 음식을 줄 때는 그렇게 해야 복이 있다는 말씀을 빼먹지 않으셨다. 또다른 집에서 온 그릇은 빈 채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지금도 나는 다른 이에게 음식을 덜어줄 때 세 번씩 주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요즈음엔 이런 음복 문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명절에 한자리에 모일 친척이 적고, 음식을 나눌 이웃이 사라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밥상머리에서 나눔을 배우지 못한다. 도리어 명절이면 남는 음식이 문제가 된다. 떡은 골칫거리가 됐고, 껍질을 깐 과실도 비슷한 처지가 됐다. 이제 새로운 음복 문화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제사상을 간소하게 차리고 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21세기형’ 음복을 하는 것은 어떨까. 적덕지가 필유여경. 덕을 쌓는 집에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많이 생긴다고 했다. 올 추석, 음복들 많이 하시길.

권복기 노드콘텐츠팀 기자

bokk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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