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시론
지난 4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이념적으로 편향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퇴출시키겠다’는 발언을 했고 상당수 교육감이 이에 동조했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난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런 방식으로 교육감들이 나서서 역사 교육에 대한 통제를 시도하는 것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며, 사상 초유의 압박이라는 점에서 현장 교사들은 중대한 시국을 맞게 되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처음부터 줄곧 교육당국의 자기모순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엄연히 교육과학기술부 교과서 검정을 통과한 책자이다. 당시 근현대사 교과서는 논란을 우려하여 여러 차례 이념적 균형 조항을 넣어 검정 기준으로 삼았고, 교과서 발행 이후 역사학계의 검토 과정에서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금성 교과서가 보수세력과 경제단체 등의 공격을 받자 교육과학기술부는 수정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교과부 장관이 직접 교과서 관련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교과서 수정 절차상 적잖은 시간이 걸리고, 역사(교육)학계와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자 교과부가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교육감에게 이 문제를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자율화·개방화 시대에 민선 교육감들이, 과거 관선 교육감 때도 하지 않았던 교과서 문제를 거론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태일 따름이다. 자율의 명목으로 보충수업과 0교시까지 단위 학교에 맡길 태세였던 자들이 애초부터 단위 학교에 위임되어 있던 교과서 채택권을 사실상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학교 자치의 싹인 학교 운영위원회의 권한을, 최소한의 절차적인 민주주의조차 고려하지 않고 짓밟는 폭거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수요자 중심의 교육을 내세우는 그들이 학교현장에서 전국 채택률 40%, 서울지역 50%를 기록한 교재를 퇴출시킨다는 것은 또 얼마나 반교육적 논리인가. 자율을 무시한 채 벌어지는 구시대적 행태, 과거 독재정권 시절을 방불케 하는 규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교육감들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것을 보면, 정권 내부와 깊은 교감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학생이다. 지금껏 금성 교과서로 수업하고 수능에 대비하고 문제집도 풀어가며 공부해온 학생들의 당혹감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당장 그들에게 닥칠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교사도 실질적인 피해자다. 멀쩡한 교과서를 이념의 잣대로 매도해 버린 것에 대해 학생들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며, 덮어놓고 교과서를 바꾸라고 강요하는 교장들과도 맞서야 한다.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교육감이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채택 변경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뉴라이트의 논리, 친기업적 서술 요구로 가득한 검토의견을 전해 듣고 교장이 할 수 있는 발언은 명약관화하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학교 현장의 자율성,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학문의 전문성이 침해되고, 교과서 검정이 이념의 검증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길 광범위한 후폭풍이다. 역사 교과서 다음에는 경제·사회·윤리 등 ‘손볼’ 과목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면서 정권 차원에서 교육내용까지 개입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을 때, 다음 정권은 또다시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리되면 교과서 또한 정권 교체와 함께 기관장 물갈이하듯 바뀌어야 할 것이고, 이 나라의 교육은 참담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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