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시론
2008 광주비엔날레는 일각의 우려와 달리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1995년 출범 이래 광주비엔날레엔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오쿠이 엔위저와 함께 예술총감독으로 공동 발탁됐던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사건으로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이어, 실질적으로 재단 운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상임 부이사장에 이용우씨가 선임되자, 일각의 문화인들은 “비엔날레 파행의 핵심 인사를 문화 최고경영자(CEO)자리에 앉힌 것은 반개혁”이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엔위저 총감독이 전시를 적절히 조율해내는 동안, 이용우 부이사장은 행사의 전면에서 한발짝 물러선 모습을 보여줬고, 비판 여론은 잦아들었다. 결과를 볼 때, 엔위저 감독이 비엔날레를 단독 지휘하게 된 것은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의 기획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비엔날레의 기본 취지는, 최고의 당대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작품을 제작하게 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오늘의 방법을 점검하는 데 있다. 허나, 지구 곳곳에서 80여개의 국제비엔날레가 열리는 마당에, 광주가 작가들에게 신작을 요구해 최선의 결과를 얻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로, 주제를 내세우지 않은 채, “지난 18개월 동안 열린 전시 가운데 유의미한 문화적 실천의 결과를 다시 모아 본다”며 ‘연례 보고’라는 형식을 내세운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불러 모은 전시들은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다.
엔위저 감독은 자신의 정치색에 맞춰 작가와 작품들을 섭외했고, 그 결과 제7회 광주비엔날레는 ‘제3세계의 정치학을 내세운 최근 전시들의 집합’이 됐다. 주제가 없다고 했지만, 실제론 ‘탈식민주의’란 명확한 주제가 존재한다. 정치적 미술을 총점검하는 전시도 주요 작가들을 잘 망라했다면 흥미로웠을지 모른다. 허나,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둘러보면, 어떤 부재가 확인된다.
유럽에서 정치적 미술의 주요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그의 동료들은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 볼 수 없다. 노골적으로 말해, 유럽의 정치적 미술을 미국에 유통시키는 거점 노릇을 하는 뉴욕 뉴뮤지엄의 최근 전시를 보면, 주요 작가가 누군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목록은 엔위저 감독이 광주를 위해 마련한 목록과 거의 겹치지 않는다. 속된 말로, 이는 그의 ‘나와바리’가 지닌 한계다.
따라서 지금 광주에서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거물급 작가들은 전시의 취지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한스 하케는 왕년의 작가고, 고든 마타-클락은 요절 작가며, 토마스 데만트는 탈식민주의와 무관하다. 반면, 거물급은 아니지만 이름 있는 작가인 아이작 줄리언, 글렌 라이곤, 스티브 맥퀸, 케리 제임스 마샬, 사디 베닝 등은 (엔위저 감독처럼) 아프리카계다.
탈식민주의는 1990년대 초반 미술계의 주요 담론으로 대두됐고,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세계 3대 비엔날레)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 1997년 카셀도쿠멘타서 괴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2002년 엔위저 감독이 카셀도쿠멘타의 총감독을 맡았을 때, 이미 탈식민주의의 비평 방법은 제도화돼 힘을 잃은 상태였다. 엔위저 감독에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양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어떤 새로운 정치적 모험 또는 실험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흥미롭게도, 지난 11일 개막한 광저우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탈식민주의에 작별 인사를’이다. 광주와 광저우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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