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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역사교과서 충성경쟁이라니 / 한홍구

등록 2008-09-21 20:19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시론
학생들이 시작한 촛불시위를 겪으며 이명박 정권은 “도대체 애들이 왜 저 난리야?”로 고심하다가 답을 내린 모양이다. 전교조가 새빨간 교과서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버려놨다는 것이다. 아무런 자기반성이 필요 없는 참 행복한 답이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교과서 수정 요구는 뉴라이트나 대한상공회의소를 넘어, 이제 정부 각 부처가 충성 경쟁 하듯 수정안을 내놓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각광을 받은 것은 국방부의 수정요구안이었다. 이 안은 역사학계나 진보진영의 반발을 산 것은 물론이고, 한나라당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선진자유당마저 ‘이명박 정부의 오도된 역사의식을 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분명 21세기인데, 국방부의 역사인식은 박정희 시대의 ‘국난극복사관’이나 전두환 시대의 ‘웅비사관’(당시 국방부는 <민족 웅비의 발자취>라는 역사책을 펴내 전 군에 보급했다)에 머물러 있다. 한국 현대사 연구는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는 정치적 이유로 현대사 연구가 불가능했지만, 민주화와 더불어 젊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연구성과를 쏟아냈다. 역사 연구자의 시각에서 볼 때, 국방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퇴역 군인들이 자기들한테 익숙한 낡은 무기가 최고의 무기라고 우기면서 첨단무기 다 내버리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

역사는 자랑하기 위해 배우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를 거울 삼아 좀더 나은 오늘과 내일을 만들기 위해 배우는 것일까?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과오는 반드시 되풀이된다. 제주도 4·3 사건의 교훈을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을 피할 수 없었고, 또 광주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군의 정치개입이라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며칠 전 군사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교과서 수정요구안을 낸 그 국방부는 작년 말,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지난 시기 군의 정치개입과 인권침해에서 비롯된 얼룩진 역사를 반성한 바 있다. 그 국방부가 엉뚱하게 불온도서 목록을 발표하더니, 이제 냉전 시기의 낡은 역사를 들고 나오고 있다. 오죽하면 교육과학기술부 장관마저 국회에서 국방부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요구에 대해 “상당히 유감”이라고 말했을까?

현재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주로 90년대의 연구성과만을 반영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현대사에 대한 학계의 인식은 여러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에 힘입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만약 근현대사 교과서가 수정되어야 한다면,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이 반영되어야 마땅하다. 군과 관련해서도 꼭 기록해야 할 내용이 있다. 한국군은 50~60년대에는 연평균 1500명 이상이, 70년대에는 1000명 이상이, 80년대에는 800명 이상이 전쟁을 치르지 않고도 죽어갔다. 민주화 이후 사망자 수는 급격히 떨어져 21세기에 들어 연간 120~130명 안팎으로 줄었다. 이것은 비극적인 역사인 동시에 민주화의 영향 아래 군이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과이다.

4·3 사건, 민간인 학살, 5·16 군사반란, 광주학살 등은 나라를 지키라고 준 총을 군이 거꾸로 들어 일어난 비극이다. 군 수뇌부가 총을 거꾸로 든 역사를 미화한다면, 국민들은 ‘군이 이런 일을 다시 저지를 수 있구나’ 하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군은 지난 20여년간 애써 회복해 온 국민들의 신뢰를 스스로 파괴해 버리려 하는가? 이명박 정부여, 교과서만 바꾸면 학생들이 지지할 것이라는 미몽을 버리시라! 지금 이명박 정부가 꿈꾸는 것보다 훨씬 더 센 교과서로 배운 친구들이 대학에만 갔다 하면 다 ‘극렬 좌경 용공’이 되지 않았던가? 정부가 잘하지 않으면 교과서 백날 바꿔 봐야 아무 소용 없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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