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아침햇발
지난주 ‘삼성 사건’ 항소심 판결이 있었다. 1심 판결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 내용은 1심보다 삼성에 훨씬 유리한 것이었다. 판결 직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입가에 번졌다는 엷은 미소가 이 판결이 갖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2심 판결의 핵심 취지는 ‘지배권 이전을 목적으로 신주(전환사채나 신주인수권부 사채) 등을 발행하는 경우, 신주를 적정 가격보다 저가로 발행해도 회사에 손해가 없으므로 형사적 책임(배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판례나 통설과 배치된다. 이사회가 실권주를 특정인에게 배정함으로써 회사 지배권을 넘기는 것은 배임 행위에 해당한다는 게 다수 학설이다. 같은 사안으로 허태학·박노빈 전 삼성에버랜드 사장은 1·2심에서 배임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월급쟁이 사장들은 유죄를 받았는데, 핵심적 구실을 한 이건희 전 삼성 회장과 당시 비서실 간부들은 무죄를 받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보통사람 눈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 판결에 대한 학문적·법률적 논란은 전문가들 몫으로 남겨 두자. 그에 앞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이번 판결이 무슨 결과를 낳았으며,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이다.
삼성 사건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이건희 전 회장 등이 수조원의 비자금을 불법 조성해 운용했고, 이 자금으로 검찰·관계 등에 불법 로비를 벌였으며, 에버랜드와 삼성에스디에스의 신주 발행을 통해 이재용씨에게 삼성 경영권을 불법으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비자금 조성 의혹과 불법 로비 부분은 조준웅 특검이 말끔하게 해결해 주었다. 특검은 4조5천억원의 차명자금이 이병철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이라는 삼성 쪽 주장을 아무런 수사 없이 그대로 인정해 이를 양성화해 주었고, 불법 로비 혐의에 대해서도 성의 있는 수사를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삼성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도 2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 경영권 승계 작업을 뒷받침해 주었다. 특검과 사법부가 불법 의혹이 제기되었던 삼성가의 재산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후계 구도를 삼성이 원하는 대로 공인해 준 셈이다. 2심 판결이 “우리 주류사회의 안정성과 견고성을 보여주는 명판결”이라는 비웃음을 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삼성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2심 판결이 대법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면 재벌들의 비상장회사를 통한 경영권 승계가 자유로워진다. 전환사채 등을 싸게 발행해 2세나 3세 등에게 넘겨준 뒤 이를 통해 그룹을 장악하는 게 아무런 죄가 안 된다고 했으니 누가 이런 편법을 이용하지 않겠는가. 2심 판결은 ‘내 재산 내 맘대로 자식에게 넘기는데 무슨 시비냐’는 재벌들의 천박한 법의식을 추인해 준 것과 다름없다.
이런 ‘명판결’을 내린 ‘명판사’는 서기석 서울고법 부장판사다. 부산의 한 명문고를 거쳐 서울의 최고 대학을 나온 엘리트 법관으로, 소신 있는 판결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심 판결을 뒤집고 2심에서 법정구속을 하는가 하면, 1심에서 유죄가 난 사람도 무죄로 풀어주기도 했다.
그는 이번 판결을 하면서 ‘법리적 판단’만 했음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그가 과연 또다른 ‘외부 변수’의 영향을 받지 않고 판결을 내렸다고 보기에는 그가 내세운 법리가 너무 옹색하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는 판결을 보고 난 뒤 재판부에 이렇게 묻고 싶다고 했다. “정말 자유로운 상태에서 판결을 내렸는가. 판결 결과를 가지고 행복한가.”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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