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오/좋은교사운동 대표
시론
4·15 학교 자율화 조처가 발표되고, 그 1단계 조처인 29개 지침이 폐지된 지 6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학교를 지배하던 관료적 지배의 사슬을 끊어내고 단위 학교에 실질적인 자율을 줘 우리 교육을 살리겠다는 교과부의 공언과는 달리 학교 현장에서 이전과 다른 자율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오히려 학생들의 입시 경쟁과 학부모의 재정적 부담이 더 증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4·15 학교 자율화 이후 학교 현장에서 가장 크게 나타난 변화는 사설모의고사 실시 횟수가 늘어난 것이다. 29개 지침 폐지 가운데 ‘사설모의고사 금지’가 폐지되자 각 고등학교에서는 국가나 시·도교육청 주관 모의고사가 충분히 있음에도, 경쟁적으로 사설모의고사 실시 횟수를 늘려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 증가는 물론이고 수업결손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학사(수업 및 일과 운영) 지도 지침’ 폐지로 그동안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아침 8시 이전 등교나 강제적인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 더 많은 학교에서 더 노골적,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학교와 신문사의 결탁으로 반강제적인 구독이 이루어졌던 어린이 신문 구독도 지침 폐지 이후 조심스럽게 늘어나고 있다.
왜 학교 자율화 조처에도 단위 학교의 자율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입시 부담만 조금 더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4·15 학교 자율화 조처가 본질호도식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즉, 말은 학교 자율화를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그동안 단위 학교의 자율화를 위해 주장되어온 교장공모제나 교육과정의 자율화와 교사별 평가, 시·도교육청 개혁 등의 내용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교육 상황의 변화로 무의미해진 지침 몇 개를 없애면서 이것을 마치 학교 자율화인 것처럼 포장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지나친 입시 경쟁을 억제해왔던 지침을 경쟁을 중시하는 정권의 교육철학에 맞추어 폐지하고, 교육관련 이해 집단의 이해를 억제해왔던 지침도 폐지하다 보니 학교 자율은 온데간데없고 그렇지 않아도 힘든 학생들의 입시 경쟁과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만 늘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지금도 교과부는 4·15 학교 자율화 조처가 학교 현장 가운데서 어떤 자율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나, 29개 지침 폐지로 입시 경쟁이 좀더 강화된 현실에 대한 진단을 하지 않고 2차 지침 폐지를 통한 학교 자율화 추가 진행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물론 불필요한 지침은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학교 자율화의 이름으로 거창하게 포장해서는 안 되고 교과부의 일상 업무로 처리하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4·15 학교 자율화 조처 때와 같이 여기에 경쟁 강화라는 정권의 교육 철학을 집어넣거나 몇몇 이해 집단들의 이해를 반영해서는 결코 안 된다.
무엇보다 교과부는 그동안 학교 자율화의 핵심 정책으로 3회에 걸쳐 시범실시 결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교장공모제를 조속히 법제화해야 한다. 학교의 구성원인 학부모와 교사가 자신들의 뜻에 맞는 교장을 선임하고, 그 교장이 학교 구성원들의 뜻을 모아 학교를 책임있게 경영하는 이 제도의 도입이야말로 학교 자율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학교 교육과정의 자율화 폭 확대와 교사별 평가 도입, 학교가 교육청과 교육 관료가 아닌 학부모와 학생에게 책임을 지는 방식의 학교평가와 교원평가 개혁, 시·도교육청의 학교지원센터 전환 등을 통해 실질적인 학교 자율화를 위한 정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병오/좋은교사운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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