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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역사, 생각 말고 달달 외우라고? / 박태균

등록 2008-10-17 20:55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시론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는 한 조기 유학생으로부터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한 영국 군인의 편지가 역사 시험문제에 예문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전쟁의 처참함과 함께 자기가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였다.

그런데 그 학생은 답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고민했다는 것이다. 이 편지를 읽고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쓰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 편지의 내용이 제1차 세계대전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 페이지 이상을 빼곡히 적어 내려가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학생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상상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한국의 역사교육이었다.

최근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 대한 학술대회가 있었다. 각국의 교과서들이 역사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를 분석한 학술대회였다. 한·중·일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명한 학자들도 참여한 이 학술대회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서술되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교분석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이 동의한 사실은 강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동북아 각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나타나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주목된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 공통점은 너무나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미팅에 나가 상대방에서 역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그 지루한 과목을 왜 공부하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경험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근현대사 검정 교과서의 수정 과정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역사 교과서 안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검정 교과서의 수정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누가 구성원인지 알 수 없는 위원회를 만들어 수정을 요구하고, 만약 수정 요구를 거부할 경우 검정을 취소하겠다고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다.

교과부는 학생들의 질문과 토론보다는 획일적인 내용을 달달 외우기만을 강요했던 과거의 역사교육을 다시 부활하려고 한다. 다양한 시각에서 단순한 암기보다는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을 권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검정제도가 도입된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폐기되는 것인가? 장관의 수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검정을 취소하겠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국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은 두 가지다. 우선 역사 교과서를 대한민국에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내용으로 채우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긍심은 위에서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의 투사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획일적으로 강조했던 교과서로 공부한 사람들이다. 교과부가 ‘친북 좌편향’이라고 비난하는 교과서로 배운 요즈음의 많은 젊은이들이 ‘통일’에 대해 반대하고 ‘북한’에 동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둘째로 모든 교과서의 내용을 정부의 입맛에 맞게 획일화하겠다는 것이다. 게오르규의 <25시>는 독일 파시즘의 획일주의, 우월주의가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가를 희화화했고, 우리는 그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히틀러 체제를 마음껏 조롱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25시’라는 폐허의 시간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인가?


왜 고려시대 무인들은 몽골에 저항했고, 귀족들은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런 공부는 대학에 가서나 하라고 핀잔을 주었던 역사 선생님은 필자를 역사학자로 만들었다. 필자와 비슷한 경험을 통해 역사학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위안을 삼기에는 교과부의 정책이 너무도 엉뚱하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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