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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금융위기, 이데올로기, 경제학 / 박종현

등록 2008-10-19 22:21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시론
미국의 금융위기가 격화되면서 금융사의 오만과 탐욕, 시장의 무능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이들의 예상처럼 시장의 힘이 줄어들고 정부의 힘은 커지는 방향으로 새로운 균형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부의 책임도 크다. 정책 당국은 정교한 금융공학 모델을 과신한 금융사들의 위험한 도박을 방관했다. 대표적인 감독 당국인 연준은 소비자 보호관련 법규를 강화해 광풍을 누그러뜨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간섭주의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유동화증권과 파생상품 덕택에 금융시스템은 과거보다 더 안전해졌고,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시장이 자정능력을 발휘하리라는 낙관론을 유포한 게 바로 연준이었다.

정부 실패는 금융위기의 확산과정에서도 발견된다. 올해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정책 당국이 단호하고도 확실한 개입을 꺼린 끝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리먼 브러더스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거부한 재무부의 선택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 결정을 누구에게든 돈을 빌려주었다가는 떼일 수밖에 없다는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인 시장 참가자들이 모든 거래를 중단해 가뜩이나 부족한 유동성을 완전히 고갈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재무부는 이후 위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격화되면서 공적자금 투입은 없다는 원칙을 철회한다.

이러한 정책 오류들은 월가의 사람이 정부의 일원이 되는 상황에서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본연의 책무를 저버린 정책당국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이 ‘정부보다는 시장이 현명하다’거나 ‘민간은 선이고 정부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경제학의 핵심 원리로 믿고 이를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한 풍토에서 비롯된 측면도 크다. 그 일차적인 책임은 경제학계에 있고, 이는 추상화된 모델에 집착하는 경제학의 편향된 방법론과 관련이 깊다.

언제부턴가 학계에서는 역사나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경제현상 이면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밝혀내려는 노력들이 줄어들고, 현상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은 추상적인 모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났다. 경제성장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해마다 노벨경제학상 후보자 일순위로 주목을 받던 폴 로머는, 전자를 현실주의자, 후자를 근본주의자라 부른다. 그의 평가로, 근본주의자들이란 모델과 데이터가 일치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탓하고 세부적 사실은 무시한 채 자유화·민영화와 같은 원론적 처방만을 내어 놓는 사람들이다. 모델에 특화한 경제학자들이 시장편향적인 것은 연구방법과 관련이 있다. 정부나 제도는 이들에게 모델의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불순물이거나 모델의 설명력을 떨어뜨리는 훼방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마침내 정부나 제도의 현실적 기능에 대해 부정적인 신념체계를 굳히게 된다.

여기에 경제·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하게 되면, 저명한 경제학자들조차 ‘시장은 자원을 배분하는 효율적인 기구’라는 경제학적 지식과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나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뒤섞는 희비극에 동참하게 된다. 이들은 시장이 어떤 환경에서 더 효율적일 수 있을지, 정부의 비효율과 부패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대신 특정 조건에서만 타당한 명제들을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신성 불가침의 진리로 변질시켜 대중들에게 좋은 시장과 나쁜 정부 중 양자 택일을 강요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이 금융공학의 마술을 세일즈하지 않고 파생상품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면 가혹한 금융위기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종현 진주산업대 산업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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