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영무 논설위원
아침햇발
물이 빠지면 바닥이 드러나듯 금융위기로 세계 각국은 대체로 밑바탕을 내보였다. 미국은 빚더미를 깔고 앉아 있고, 빚으로 연금술을 부리던 아이슬란드는 국가부도 위기를 맞고 있다. 고통은 예외 없고 처방은 비슷하지만 나라별로 처한 상황은 형편에 따라 꽤 차이가 난다. 채권국으로 불편한 중국은 당분간 내수와 농업에 주력할 심산이다.
한국 정부는 경제 기초여건(펀더멘털)이 튼튼하며 내년에는 경기가 나아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를 다시 쓸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한국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밑천을 드러냈다.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나라면 세계경제의 흐름과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뭔가 다르고 나 홀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예외와 우월주의의 착각에 빠졌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불거지고 세계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경고음이 울렸는데도 ‘747 공약’이 나오고 먹혔다. 흐름을 읽지 못하고 허황된 기대 속에 살았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
뒤늦게 정부가 외평채를 발행한다고 나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선 일이 그것을 말해준다. 중국과 일본에 아시아공동기금 어깨동무를 제의했으나 지지부진하고, 미국에 통화스와프를 제안했다가 무안을 당한 것도 그렇다. 외환시장의 불안이 지속되고 신용평가 등급에 부정적 기류가 짙어지는 것은 이처럼 ‘분위기 파악 못하는’ 데 대한 회의가 반영됐다고 본다. 외환위기 이후 개방을 했지만 상품과 자본만 세계화됐을 뿐, 머릿속은 여전히 반도에 머물러 있다.
세계경제의 침체가 짧게는 1~2년, 길게는 5년 가까이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세계경기 하강 국면에서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만 잘나갈 수 없다. 착각에서 벗어나 소규모 개방경제의 분수에 맞게 관리 운용을 해나가야 한다.
한국이 미국식 자본주의 곁에 바짝 붙어 섰고 미국 중독증이 심각한 사회라는 것도 밑천을 갉아먹는 요인이다. 우리에게 세계나 외국은 곧 미국이요, 경제사회 제도의 상당 부분은 미국화됐거나 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처음에 유럽 금융구제 펀드를 거부한 독일의 사례를 보면 뚜렷이 대비된다. 독일은 주식투자 인구가 국민의 5%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은행에 한 푼 두 푼 꼬박꼬박 저축을 한다고 한다. 집은 절반이 임대로 살기 때문에 부동산 거품은 아예 없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지만 근검이 몸에 배어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부동산 거품으로 호황을 누려온 남부 유럽을 위해 독일 납세자들의 돈을 쓸 수 없고, 사기꾼에게 백지수표를 쥐여줄 수 없다’며 구제펀드를 거부했다.
독일과 미국을 양쪽으로 벌려 놓고 볼 때 한때 독일 쪽에 가까웠던 우리가 얼마나 미국 쪽으로 쏠렸는지 쉬 짐작할 수 있다. 소비·경쟁·재테크는 정부와 국민의 꿈이요 미래어인 반면, 평등·공동체·근검절약은 금칙어가 됐다. 돈을 쉽게 벌려는 유혹과 거품은 한국도 월스트리트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사람을 만들어간다. 이것이 만드는 사람은 민주주의 정서와 능력을 이상적으로 갖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러 학자가 말했다.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 바이러스에 깊이 감염된 한국을 보는 다른 나라의 시선에는 그러한 경고가 반영됐을 법하다. 외화 차입에 대한 지급보증이나 달러 공급 확대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세계는 시장과 정부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경제 효율과 사회 정의를 조화시키는 쪽으로 궤도를 틀지 않으면 한국은 갈수록 밑천이 달릴 것이다.
정영무 논설위원young@hani.co.kr
정영무 논설위원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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