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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시민단체와 ‘새로운 적’ / 조대엽

등록 2008-10-21 20:46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시론
가끔 듣는 대중가요로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가 있다. 러시아 여가수가 부른 원곡이 그런대로 좋지만, 아무래도 심수봉이 쓴 노랫말이 마음을 끄는 탓이 크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사랑’에는 필연과 묵시록적 기원이 엿보여서 그 깊이가 좋다. 가볍고, 빠르고, 뜨거움이 만연한 세속에서 이처럼 무겁고 길고 깊은 사랑의 관념이 흩어진 지 오랜 탓일까? 현실의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니 대중가요 한 자락에도 어설픈 감상이 배어드나 보다.

<기독교의 본질>을 쓴 포이어바흐에게서 심수봉이 노래하는 ‘작은 음성’의 주인은 ‘인간’이리라. 신으로 구현된 ‘사랑’은 원래 사람들 속에 있던 것이고 사람들이 함께 갖고자 한 것인데 인간의 현실에서 사랑의 질서는 요원하기만 하다. 현실이 가혹할수록 사람들은 사랑을 찾고 갈망하며 동경하다가 마침내 사랑은 찬미되고 경배되어 신의 지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천상에 오른 ‘신’은 지상의 고단함을 관념으로 위안하지만, 아낌없이 사랑을 줄 때만 피는 장미를 백만 송이쯤 피워야 돌아갈 수 있다는 심수봉의 노래에서는 오히려 천상과 현실을 잇는 기교가 돋보인다.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이고 또 개신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이번 정부에 들어 시민단체에 대한 핍박이 지나치다. 이미 5월에 행정안전부에서 25개 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지원 제외를 발표하더니, 시민단체 압수수색, 시위피해 집단소송제 추진, 검찰의 때늦은 환경단체 수사, 비영리 민간단체 지원법 개정안 발의, 시민단체 회원명단 요구, 시민단체를 지원한 지자체와 기업에 대한 조사 등 시민단체를 옥죄는 현실이 유례없이 다각적이다.

그동안 시민단체들은 정치와 경제 개혁 운동에 힘을 기울여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또 정부와 파트너십을 가져 사회 결속에도 힘이 되었다. 시민사회는 다양한 가치가 공론의 공간에서 소통함으로써 한 사회를 자율적으로 결속시키는 장이고 그 핵심적 역할을 하는 존재가 시민단체다. 시민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저항과 갈등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는 오늘날 시민사회의 욕구를 대변하는 시민단체야말로 정부가 동반적 관계를 이뤄야 할 상대인 것이다.

동유럽 붕괴 이후 이념의 장막이 걷힌 세계는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좌파 대 우파 등 불변의 거대한 적은 사라졌지만 언제나 새로운 적은 필요하고 ‘가변적인 적’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현실의 이치다. 여기에서는 집단이나 국가 사이 일시적이고 사소한 차이도 필요에 따라 근본적 적대로 바뀌고 만다.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한마디는 늘 듣고 있을 법한 이명박 장로께서 대통령인 정부에서 시민단체는 새로운 ‘적’이 되어가고 있다. ‘적이 필요한 실용주의’는 시민단체를 내침으로 해서 새로운 균열과 갈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혹독한 겨울을 알린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민심을 모아 결속하는 일이 긴요하다. 정부와 시민사회를 이어주던 시민단체를 또다시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 때, 천상의 신은 더욱 찬미될지 모르지만 지상의 현실은 가혹해질지 모른다. 각을 세운 적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할 시점이 아닌가? 현실을 포용함으로써 저 천상의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지상에서 구현할 수는 없을까?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피어난다는 백만 송이 장미 가운데 몇 송이라도 피울 수는 없는 것인지 ….

조대엽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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