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아침햇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 자신의 기대와 희망이 더해지면 객관적 현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왜곡된 현실 인식만 남게 된다. 이는 상황 판단을 그르치게 하고, 그릇된 판단은 잘못된 대응으로 이어져 현실을 더욱 꼬이게 한다.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 태도를 보면 꼭 그 모양이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주가가 3000까지 간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그의 평소 말투처럼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냐”는 식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세계 금융위기로 온 나라들이 궤도 수정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4%대 성장을 꿈꾸며 우리 경제의 앞날을 장밋빛으로 전망하고 대응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기불황을 놓고 10여 년 전의 외환위기 때보다 어렵다는 말들이 자연스레 오간다. 단순한 엄살이 아니다. 기업과 은행의 건전성 지표나 외환 보유액 등은 당시보다 훨씬 양호하지만 이런 지적이 계속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위기의 본질은 금융거품 붕괴에 따른 신뢰의 위기다. 신뢰의 위기는 시장에서 믿음이 사라짐으로써 누구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사라진 시장에서는 현금이나 각종 금융상품(채권·기업어음·파생상품 등) 등 신용을 바탕으로 순환되던 시중 유동성이 극도로 위축된다. 이는 곧 금융산업 위기로 이어진다. 실물경제와 별개로 하나의 독립된 산업인 것처럼 화려하게 각광받던 금융산업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 등 초대형 투자은행들에 이어 중소형 은행들의 도산이 줄을 잇고 있다. 미국 금융의 상징으로 불리던 씨티그룹도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금융산업의 몰락은 곧 실물경제 위축으로 이어진다. 미국 최대 자동차회사인 지엠(GM)의 몰락은 상징적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때 1000조원을 웃돌던 주식의 시가총액은 1년 만에 반토막이 나면서 500조원 이상이 공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한해 수조원대의 이익을 내던 은행들은 적자 상태로 돌아서고 있다. 그 여파로 건설업체를 시작으로 기업 도산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는 그대로다.
일부에서는 지금의 위기를 외환위기에 빗대어 1~2년만 잘 견뎌내면 다시 예전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는 여전히 ‘잘만 하면’ 내년 성장률이 4%대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외환위기와 그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위기 발생이 지역적이냐 세계적이냐의 차이만은 아니다. 위기가 ‘세계화된 금융시장의 붕괴’에서 촉발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금융의 몰락은 금융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금융 없는 실물경제는 상상하기 어렵다. 금융·실물의 동반 침체는 불가피해 보인다. 경제성장률이 몇 %나 될 것이냐를 따질 때는 이미 지났다.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전환점에 서 있다. 더듬거리며 출구라도 찾아갈 수 있는 컴컴한 터널이 아니라 모두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빙하기’ 초입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금융과 실물의 거품이 꺼진 뒤 금융이 제자리를 잡으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금융이 제구실을 하기 전까지는 건설사 돈 퍼주기나 감세, 재정 확대 등 기존의 경기부양책을 아무리 써 봤자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위기가 금융의 몰락에서 초래됐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거 위기 때와 달리 훨씬 길고 험난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의 냉철한 현실 인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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